엄씨 (영월)

한국주요성씨


엄씨 (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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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엄씨嚴氏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영월 엄씨寧越嚴氏 139,681명, 영성 엄씨 1,588명, 기타 엄씨 3,156명으로 총 144,425명이다. 문헌에 의하면 밀양^상주^하음^광주^파주 등 60여 본이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영월 엄씨의 분파이며, 나머지는 세거지명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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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씨嚴氏의 연원


시조는 엄임의嚴林義로, 고려조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고, 내성군奈城君에 봉해지면서 영월을 식읍으로 받아 행정杏亭에 정착하였다. 이곳이 임의를 시조로 모시는 영월 엄씨의 본관이다. 당시 임의 공께서 심었다고 전해지는 강원도 영월군 하송리 190-4번지 은행나무는 이후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지금도 의연히 서 있다.

「기미보己未譜」 ‘씨족사략氏族史略’ 편에 보면, 시조 엄임의는 본래 중국 한漢나라 엄자능嚴子陵의 후손으로 당唐의 현종이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우리나라에 전파할 때 엄임의를 정사로, 영월 신씨寧越辛氏의 시조인 신시랑辛侍郞을 부사로 파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그리고 엄임의에게는 세 아들이 있어 큰 아들 엄태인嚴太仁은 고려조에 검교檢校 군기감윤軍器監尹을 지내 군기감공파의 파조가 되었고, 둘째 아들 엄덕인嚴德仁은 복야공파僕射公派의 파조, 셋째 아들 엄처인嚴處仁은 문과에 올라 문과공파文科公派의 파조가 되어 세 갈래의 계통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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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사의 개요


죽음의 칼날과 맞서 충절과 인륜의 도를 실천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경구가 바로 영월 엄씨 가문의 가헌家憲이다. 조선의 6대 군주인 어린 왕 단종에게 바친 충절로 보복의 칼날 앞에 서더라도 결코 두려워 않겠다던 가문의 12세손 엄흥도嚴興道의 유훈遺訓이 문중의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도록 방치되며 “누구든 손을 대면 3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있었다.

서릿발 같은 엄명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목숨을 노리는 줄을 알면서도 그는 거적에 싸인 단종의 시신을 수습, 동을지산冬乙旨山(현재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莊陵)에 묻었다.

18대 현종에 이르러 단종의 무덤이 봉릉奉陵되고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단종의 주검을 수습했던 옛사람을 찾았으나 엄씨들은 무슨 재난이 닥칠까 두려워, 가문의 족적을 적어 둔 문적까지 없애고 자꾸만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더구나 단종 묘에 선영先塋이 있던 엄씨들은 묘가 능으로 추봉되면서 사방 5리 안에 있는 개인 묘를 모두 옮기라는 어명에 따라 선영까지 포기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 난리로 인해, 오늘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은 10세조까지의 묘를 모두 실전失傳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엄흥도의 충절과 인륜의 도가 알려진 것은 영조 때이며, 23대 순조에 이르러서야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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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지화를 겪다
엄씨 가문은 연산군 시기에 이르러 호된 시련을 겪는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죽음이 엄유온嚴有溫의 4세 손녀이자 성종의 귀인이었던 엄씨 등을 비롯하여 윤필상尹弼商 등 열두 대신의 간계라는 임사홍任士洪의 모함으로 이들 대신들과 함께 엄귀인의 아버지 사직공司直公과 오빠 엄회嚴誨⋅엄성嚴誠 등 세 부자가 참살을 당한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으로 몰려 단죄를 받게 되는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이로 인해 엄씨 가문은 한동안 빛을 잃은 듯하다가 중종 때에 이르러 누명을 벗고 16세손 엄흔嚴昕이 대제학으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선조들의 맥을 다시 이어 간다.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린 엄흔의 시조


 

선善으로 패敗한 일 보며 악惡으로 이긴 일 본가.
이 두 즈음에 취사取捨 아니 명백한가.
평생에 악惡한 일 아니하면 자연自然 유성有成하리라.


 

서예 분야에서 실력자를 배출
영조 때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엄한명嚴漢明과, 정조 때 엄계응嚴啓膺은 서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엄한명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한석봉 이후 제일의 명필로 고금의 서법을 집대성한 「집고첩集古帖」을, 엄계응은 「약오가장초藥塢家藏抄」 등의 저서를 남겼다. (※ 抄와 鈔는 이체자異體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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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물 도입에 앞장섬
엄씨 가문은 근세에 이르러 신문물新文物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조선 말,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이 엄세영嚴世永이다. 186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그는 국제 정세에 밝았다. 외교가로 1866년부터 1867년 초까지 동지사冬至使 이풍익李豊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고종 23년(1885년)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점령했을 때는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 도웰 함대 사령관과 담판을 하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행호군으로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와 호남선무사로 임명되어 동학교도의 귀향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김홍집金弘集 내각 성립 후 두 차례에 걸쳐 농상아문대신農商衙門大臣·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경상북도관찰사·종일품관으로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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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
영월 엄씨가 배출한 유일한 왕비가 엄비이다. 이은李垠(영친왕)의 생모이며, 만년에는 육영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엄비는 시조의 26세손으로 고종의 순헌황귀비이며, 숙명여자대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진명여자중학교^진명여자고등학교^양정고등학교 등의 교육 기관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대일 항쟁기 엄씨 가문의 활약
안중근 의사와 함께 1908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아 두만강을 건너 함북 경흥의 일본 군경에 큰 피해를 입혔던 의병장 엄인섭嚴仁燮은 무력 항쟁이 여의치 못하자 연해주에 정착, 농업에 종사하며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엄순봉嚴舜奉은 만주로 건너가 1933년 북만주 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편성, 청년부장에 취임했다. 만주 일대 동포들을 상대로 항일 투쟁 의식 고취,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백정기 의사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해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상해 조선인 거류민회를 조직,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영노李榮魯를 추적 끝에 응징 살해하고 체포돼 순국하였다.

엄정섭嚴正燮은 1916년 대구에서 박상종 등 동지들과 광복회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 항일 유격 활동을 했는데 친일 부호 장승원의 암살 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역사 속 주요 인물


엄유온嚴有溫(?~?) - 시조의 11세손이며, 조선 창업의 개국 공신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동지총제同知總制를 역임했다.

엄황嚴愰(1580∼1653) - 조선 후기의 무신이며, 자는 명보明甫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으나 붓을 꺾고, 1603년(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로 등용되고, 1606년(선조 39년) 남해현령이 되었다. 후에 안동판관을 거쳐 함안군수 등을 지내면서 청렴한 수령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청량산淸凉山을 수축해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있을 때에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정에 감동한 읍민들이 조정에 올라가 유임을 청원해 마침내 누명을 벗고, 그곳 군수로 다시 부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년) 경상좌수사가 되면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

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으로서 병사들을 정비해 끝까지 국경을 사수했으며, 그 공으로 가선嘉善으로 품계가 올랐다. 1652년(효종 3년) 영흥부사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춘천지春川誌」가 있다.

엄숙嚴琡(1716 ~1786) -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인璘, 자는 유문孺文, 호는 오서梧西이다. 175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리校理와 승지 등을 지냈고, 1771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그는 부당한 업무 처리를 바로잡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전국의 한전旱田에 급재給災(재해를 입은 논밭에 대하여 세를 면제함)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찌기 예문관에서 봉직하고 있을 때 대신 김상로金尙魯가 체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하자 신랄하게 규탄함으로써 시정하도록 하였다.

177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중국에 들어가 크게 활약한 결과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이듬해 귀국하였는데, 돌아와서는 그간에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저서 「연행록 燕行錄」을 간행하였다.

현 시대의 영월 엄씨 주요 인물로는 엄삼탁, 엄기영, 엄홍길 등을 들 수 있다.

엄삼탁嚴三鐸(1940~2008) - 국가안전기획부장 보좌관,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대통령 국방 담당 보좌관, 안기부장 비서실장, 병무청장, 국민생활체육협의회 회장 등을 지낸 정치인이다.

엄기영嚴基永(1951~현재) - 대한민국의 전직 언론인 출신으로 전직 정치인, 현재 사회기관단체인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사 학위 취득을 한 후 1974년 MBC에 입사해서 기자, 앵커, 보도국 등을 역임하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MBC 사장을 역임했다.

엄홍길嚴弘吉(1960~현재) - 대한민국의 대표적 산악인이다. 박영석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인류 역사상 아홉 번째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14좌에 완등했다. 8천 미터급의 위성봉 얄룽캉을 완등하기도 했다. 2007년 5월 31일에는 8,400미터의 로체샤르도 완등하면서 세계 최초로 16좌 완등에 성공했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2) 위키백과 영월 엄씨 등
3) 성씨 정보 (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월 엄씨寧越嚴氏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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