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씨 (창원)

한국주요성씨


구씨 (창원)

세계성씨연맹 0 954
우리나라에서 갖출 구具 자를 쓰는 구씨具氏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능성 구씨綾城具氏 108,209명, 능주 구씨 62,574명, 릉성 구씨 1,460명, 창원 구씨昌原具氏 13,339명, 회산구씨 2,762명, 기타 구씨 4,736명 등 총 193,080명이다. 능성 구씨와 창원 구씨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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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구씨昌原具氏


씨족의 연원
능성 구씨綾城具氏와 같은 갖출 구具 자를 성씨로 쓰는 창원 구씨昌原具氏가 있다. 그런데 창원 구씨는 처음에는 원수元帥 구仇 자를 성씨로 사용하였다. 시조는 구성길仇成吉, 자는 완지完之, 고려조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고려 혜종 2년, 서경의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입경하여 권신 왕규王規의 전횡專橫을 토벌하여 세운 공으로 의창군義昌君이란 호와 함께 서경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런데 구성길仇成吉 이후의 구설仇雪 대까지의 세계가 확실치 않음이 <임오보壬午譜>와 <정사보丁巳譜>의 불일치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기간이 혜종조에서 공민왕조까지 4백년이 넘는다. 그래서 부득이 <임오보>에 따라 구설仇雪로부터 계세計世키로 하여 원대손遠代孫이라 부르고 있다.
 
창원 구씨昌原具氏에 대한 역사 기록
1762년(영조 38)의 창원 구씨 초간세보初刊世譜인 <임오보壬午譜>에는 “구씨仇氏는 멀리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어진 재상이 이어졌다.”라고 되어 있는데, 신라 진흥왕 때의 구진仇珍 장군, 진평왕 때의 대사大舍인 구문仇文, 문무왕 때의 사찬 구진천仇珍川, 술간述干 구기仇杞, 구근仇近 등이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에는 “의창義昌의 촌성村姓이 구仇”라는 구절이 있으며, 후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전국 각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구仇 성은 창원에서 시작된 성씨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김해 금관국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구해仇亥였던 사실, 함안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안라국의 인물 중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 구취유리久取柔利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 창원 지역의 옛 지명에 구사모라久斯牟羅, 구사군仇史郡이 있었다는 사실 등은 구仇라는 성씨가 창원 지방의 지명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 준다.
 
창원 구씨의 시조 구성길仇成吉
구성길仇成吉은 고려 혜종 때 찬성사를 지냈다. 혜종이 죽은 뒤 권신 왕규가 전권을 행사할 목적으로 충신 박술희朴述熙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정종은 서경의 수비대장인 왕식렴王式廉을 동원해 진압하였다. 이때 왕식렴을 따라 공을 세운 이가 구성길이었다. 그래서 의창군義昌君의 칭호를 받고 의창(현 창원)에 봉해졌다. 그 아들 구설仇喜도 찬성사를 지냈고 손자인 구경은 수안현감遂安縣監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는 뒤에 <임오보壬午譜>와 <정사보丁巳譜> 등에 상치되는 점이 있어 <갑자보甲子譜>에서는 시조를 5대 구설仇雪로 삼는다. 아무튼 찬성사 구성길은 창원昌原(의창義昌)에서 식읍하고 조선의 음덕으로 앞서 언급된 바처럼 그 자손의 벼슬과 덕행이 세대를 이었다고 한다.
 
창원 구씨의 중흥中興
2세손 구종길仇宗吉은 昌原 具氏의 중조中祖로 숭앙받은 인물이다. 조선 세종조 문과에 합격, 홍문관직제학을 하였는데, 천성이 정직, 엄격하고 재능도 뛰어나 세종의 은총을 입어 강론도 하였다. 그가 역학에 밝아 왕이 향주香酒와 주역周易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의 큰아들 구복한仇復漢은 일찍이 무과에 출세하여 벼슬이 충청도사忠淸都事를 거쳐 강계부사 겸 전라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 구동설仇東薛은 진사를 지냈고, 셋째 아들 구동직仇東直은 문종 때 승지를 지냈다. 그의 아들 삼 형제와 동생 구원길의 아들, 즉 구종길의 조카를 합하여 총 네 파조로 분파되었다.

구복한의 증손 구자평仇自平은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단종의 손위遜位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 절개를 지키다 일생을 마친 분으로 뒤에 명신록名臣錄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의 사충 구응진 가문
창원 구씨가 자랑하는 인물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이른바 사충四忠으로 일컬어지는 구응진仇應辰·응성應星·응삼應參·동棟 등이다. 구응진仇應辰은 임진왜란을 맞아 분충창의奮忠倡義로 김해에서 전사했고, 아우인 응삼應參과 종재傱才 응성應星, 그리고 그의 아들 동棟은 구응진仇應辰을 도와 전공을 세워 사충四忠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별히 임진왜란과 연관하여 기록해야 될 것은 구정려仇廷呂에 관한 행적이다. 그는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있으면서 전란의 와중에서 이 태조의 어진御眞과 전주 사고史庫에 보존되었던 왕조실록을 정읍현 내장산 용굴암에 보관, 이듬해 강화까지 무사히 옮기는 일을 수행하였다.

학문에 큰 족적을 남긴 분으로는 구상덕仇尙德이 있다. 그는 특히 ‘철수재문장鐵收齋文章’에 일가를 이루었고, 후학 양성에도 힘써 월봉서실月峰書室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저서로서 대표적인 것이 「승덕명록勝德明錄」이다.
 
창원 구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구상찬具相燦(1957~ ) - 대한민국의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2013년 주상하이 총영사로 부임했다.

구종태具鍾泰(1934~ ) - 대한민국의 제16대 국회의원이자 세무사이다. 본관은 창원이며, 경상남도 사천 출신이다.

구남수具南秀(1961~ ) - 대한민국의 제5대 부산가정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창원 구씨昌原具氏는 구씨仇氏에서 구씨具氏로 사성된 뒤 뛰어난 인물이 적어 종문宗門을 이끌 인재가 없었던 탓인지 <정사보丁巳譜> 이래 127년 동안 수보修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때문인지 후손 중에는 사성賜姓의 경위를 알지 못한 이들이 능성綾城(능주綾州)만 본관인 줄 알거나 혹은 일제의 호적령戶籍令 공포 때 관향이 와전된 대로 등재, 세습된 종문도 많다고 한다. 일부 창원 구씨 사람들이 능성 구씨, 회산 구씨로 본관을 바꾸어 이탈하는 등의 일도 일어났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한 운동으로 1924년 <갑자보甲子譜>를 간행할 때 ‘일가찾기위원회’를 구성했다. 구영학 전 대종회 회장의 후원과 구수만 ‘일가찾기위원장’의 노력으로 이탈한 후손들의 많은 수가 환본還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타본과 법정 문제까지 불거졌다. 창원 구씨 측에서는 구具씨는 본이 창원과 능성으로 두 개뿐이므로 능주(現 지명)는 근본이 창원의 이탈 문중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 구仇를 최초로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춘추春秋 시대 때 진晉나라 9대 임금 목후穆侯가 아들(11대 문후)에게 이름을 구仇라 작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2) 위키백과 능성구씨, 창원구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능성구씨, 창원구씨 등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 마을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悅美里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 시대에는 상열미동, 중열미동, 하열미동이 있었는데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 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열미리로 하였다. 이 마을에는 조선 세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의 묘소가 있는데, 그 묘소의 형국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혈燕尾穴이라 하고, 연미리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열미가 되었다고 한다. 하열미는 열미리에서 가장 큰 중심 마을이며,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어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양달말, 음달말,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랫말을 ‘벌열미’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에는 500년이 넘은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다. 실촌읍은 2011년 곤지암昆池岩읍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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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仇氏가 구씨具氏로 바뀌게 된 배경
구씨仇氏가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하게 된 것은 조선 정조 때다. 정조 15년 7월, 구시창仇始昌이 초관哨官의 후보자로 왕에게 천거되었다. 정조가 “구仇 성姓은 예부터 있었지만 구具 자字로 하느니만 못하니 구具 자로 고쳐서 올려라.”라고 하는 사성연교문賜姓筵敎文을 보냈는데, 더 확실한 문적門籍이 필요하다고 구문仇門에서 상서上書하자, 1798년 일성록日省錄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 사실을 기록하고 확증지었다. 이 교시에 따라 정조 22년 6월부터 모든 공사 문서에 구씨具氏로 실행을 보게 되었다.

정조의 사성 배경은 구仇 자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구仇는 원수元首 구仇 자로 국가 주권의 최고 대표자라는 의미가 있고 또 원수元帥의 의미도 있어 군대를 통솔하던 장수를 나타낸다. 이 밖에 짝구, 배필配匹의 의미로도 사용되어 왔다. 정조의 입장에서는 국가 원수의 의미가 담긴 구 자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반역反逆의 기운을 제어하기 위해 성을 바꿔준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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