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씨 (함양)

한국주요성씨


여씨 (함양)

세계성씨연맹 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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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음률 여呂 자를 쓰는 함양 여씨咸陽呂氏 34,385명, 성주 여씨星州呂氏 13,467명, 성산 여씨星山呂氏 9,494명, 기타 2,726명으로 총 60,522명이다.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연원


시조 여어매呂禦梅는 중국 당나라 희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황소黃巢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갑자보甲子譜〉 세록 편을 보면 경북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하고 고려 때 전서典書를 지냈다고 한다.

2세 여임청呂林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장呂子章과 여존혁呂存赫 그리고 여임청의 아우 여광유呂光有의 후손이 함양咸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대전 뿌리공원 내 함양 여씨 조형물 양쪽의 날개는 영원한 미래의 번영繁榮을, 중심의 원구圓球는 충절을, 외곽의 메스(mass)는 따스한 사랑과 효심孝心, 단합團合의 모습을 표현한다.
 

씨족사의 개요


함양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로는 여呂씨, 박朴씨, 오吳씨 등 3성이 있는데, 함양에는 고려 때 전서를 지낸 함양 여씨 시조 여어매呂禦梅와 2세인 대장군 여임청의 묘가 있다. 그런데 1655년 송준길의 묘표와 음기陰記를 새긴 비석에 의하면, 시조 어여매의 묘소는 실묘失墓를 하여 시신 없이 혼백魂魄만 모시는 장례인 초혼장招魂葬으로 봉분을 세웠다고 한다.
 

여진족 정벌에서 순국한 대장군 여임청


고려진군대장군 함양여공 임청 기념비문高麗鎭國大將軍咸陽呂公林淸紀念碑文에 의하면, 2세 여임청呂林淸은 국난에 순절하였으므로 그의 묘소에 함양군에서 제전을 행하고 수묘인호守墓人戶를 두었다고 한다.

위의 비문이나 세록에는 그가 언제 순절하였는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비문의 내용에서 여진과의 여러 대에 걸친 싸움을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순절한 듯하다. 그런데 그의 현손인 여문추呂文諏가 충렬왕조에 안렴사按廉使였으므로, 거꾸로 소급하면 고려 숙종 9년(1104)에서 예종 4년(1109)에 걸쳐 있었던 여진족 정벌과 9성 축조⋅환부 때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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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임청의 무덤에는 전설이 전한다. 바로 ‘여 장군의 넋을 달랜 이서구李書九 군수’의 이야기다. 여 장군이 죽고 오래되어 묘가 관리되지 않아 봉분도 허물어졌다. 이 무렵 함양에 군수郡守가 부임하면 오는 사람마다 모두 첫날 밤에 죽고 말았다. 아무도 함양군수로 가지 않으려 하자 전라감사를 지낸 이서구가 자진해서 나섰다. 그는 함양에 도착한 첫날 밤에 어떤 장군이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장창을 들고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 장군은 이서구에게 절을 하라고 시켰고, ‘자신의 무덤을 손보고 제사를 지내 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이 군수는 무덤을 찾아 봉분을 수리하고 석물石物을 갖추었으며 밭을 하사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함양 고을은 잠잠하여 평화롭게 되었다고 전한다.
 

여칭呂稱이 정평靖平이란 시호를 받은 까닭


함양 여씨의 인물로는 먼저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고 조선 초에 중군도총제를 지낸 정평공靖平公 여칭呂稱을 들 수 있다. 그는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고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전법典法⋅전리총랑典理摠郞 등을 역임했다. 조선 개국 후 승추부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한 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태종 2년 태상왕太上王(태조太祖)이 왕자의 난을 겪고 한양을 떠나 함흥으로 갈 때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로 배종陪從했다.

그 뒤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형조판서刑曹判書⋅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고 은거했다. 1404년에는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서 왕실의 계통이 잘못 전해진 것(종계변무宗系辨誣)을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한편,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조선 동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에게는 정평靖平이란 시호가 내려졌는데, 너그럽고 즐거이 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다스림에 과오過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하는데, 나라를 위함에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세미한 일까지도 치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세종실록 19권은 전한다.
 

뛰어난 관리들의 산실, 함양 여씨 가문


여자신呂自新은 무과에 급제, 조선 성종 10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이어 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 1492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연산군 때 도총관都摠管, 병조참판 등을 거쳐 중종 때 병조판서에 올랐다. 역시 무과를 거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청백한 관리로 이름이 났다.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재상에 오른 인물로는 운포雲浦 여성재呂聖齋가 있다. 그는 조선 효종 1년에 생원이 되고 4년 뒤 정시문과에 장원하고서 검열檢閱이 되었다. 현종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대사간大司諫⋅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숙종 4년 강릉부사江陵府使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특전되었으나 2년 뒤 보사공신保社功臣의 추록追錄을 반대하다가 좌천되었다. 이듬해 앞서 현종의 국상 때 도감으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뒤 좌참찬左參贊⋅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 1688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다시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 승전되었다가 사직,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했다. 이때 남인들이 성혼成渾, 이이李珥를 문묘에서 출향黜享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한 후, 앞서 성혼과 이이를 문묘에 배향할 때 관계관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낙향했다.

여풍섭呂豊燮의 아들인 하정荷亭 여규형呂圭亨은 고종 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고종 3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한일 합방 후 제일고등보통학교에서 한문 교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시⋅서화⋅불경에 능해 ‘사문유취事文類聚’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서상기西廂記』 문체를 모방해 『춘향가』를 『춘향전』으로 희곡화했으며, 오세창吳世昌⋅장지연張志淵 등과 더불어 『대동시선大東詩選』을 편집하였고, 「하정집荷亭集」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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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조국을 염원한 비운의 여운형呂運亨


함양 여씨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이름높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을 배출하였다. 그는 1909년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했고, 이듬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남경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중단했다. 1918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김규식金奎植을 한국 대표로 보냈다.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이해 겨울 일본이 조선의 자치 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덕수 등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야의 각계 인사들에게 우리 독립운동의 진상과 민족의 열망을 토로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1921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192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遠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고 돌아와 손문孫文과 협력하여 중국 혁명을 추진했고, 1929년 영국의 식민 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식민지 조선에 보내져 3년간 복역했다.

1933년 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1944년 조선건국연맹朝鮮建國聯盟을 조직하여 광복 후의 건국에 대비하고 해방 후 이를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이를 기초로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 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우익右翼 진영의 반대와 미 점령군 당국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그해 12월 인민당을 조직했고 이듬해 29개의 좌익 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했으며, 뒤에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조직하여 좌파 온건 세력을 규합하고 중도우파까지 수용하면서 통일된 조국을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여러 정치 세력의 통합을 위해 평양으로 가서 북측의 실력자인 김일성과 협상하기도 했다.

몽양夢陽은 1948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출신과 암살 동기가 불분명한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하였다. 몽양 암살 직후 수립된 이승만 정부에서는 주범 한지근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공범으로 갇힌 신동운은 증거 불충분이란 명목으로 석방하였다.

몽양夢陽이 세웠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당시 국내에서 건국을 주도할 가장 유력한 정치단체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백범 김구와 같이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일하다 암살된 우리나라 근대사의 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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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여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여운계呂運計(1940~2009) - 배우, 1968년 최무룡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인 〈정 두고 가지마〉로 영화에 첫 출연을 하였으며, 〈엄마의 일기〉, 〈목소리〉(1972년), 〈땅콩 껍질 속의 연가〉, 〈순악질 여사〉, 〈만추〉,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마파도〉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한국방송공사의 〈오! 필승 봉순영〉, 〈며느리 전성시대〉, 문화방송의 〈대장금〉 등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많이 출연하였다.

여한구呂翰九(1969년~현재) - 제3대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여홍철呂洪哲(1971년~현재) - 전직 기계체조 선수이자 대학교수 및 체조 해설가, 1996년 하계 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개인 도마(뜀틀)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대한민국 올림픽 체조 최초의 은메달이다. 전남체육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를 거쳤고,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딸인 여서정 또한 체조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올림픽 체조 여자 도마 종목에서 여서정이 동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부녀父女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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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성산) 여씨星州(星山)呂氏


성주 여씨는 여씨의 시조 여어매 이후의 세계世系가 병란으로 인해 관련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게 되자 고려 말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여양유呂良裕를 사실상 시조(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정착 세거지인 성주星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시조 여양유의 아들 여위현呂渭賢이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문장이 뛰어났던 여극회呂克誨가 조선조에서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5세손인 여문승呂文承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또한 중종 때 학자로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던 여희림呂希臨은 현량과賢良科에 합격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주에서 정주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낸 여대로呂大老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 밖에 조선 말 의병장으로 임실군의 대운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여주목呂株穆, 그리고 북간도에서 이동녕, 이상설과 함께 민족 교육 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후진 교육에 힘쓴 독립운동가 여준呂準 등이 성주 여씨의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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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함양 여씨 등
3) 성씨 정보 (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함양 여씨咸陽呂氏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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