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씨 (곡부)

한국주요성씨


공씨 (곡부)

세계성씨연맹 0 74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공孔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곡부 공씨曲阜孔氏가 대종으로 89,331명으로 조사됐다. 공씨孔氏의 본관은 곡부曲阜를 비롯하여 파평坡平, 수원水原, 부평富平, 남양南陽 등 45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현존하는 관향은 곡부 공씨 단본單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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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 공씨曲阜孔氏의 연원


곡부 공씨의 시조는 공소孔紹, 처음 이름은 소昭로, 고려의 문신이다, 공민왕조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졌다.
〈정묘보丁卯譜〉에 보면 공씨의 선조는 공자孔子로 세록에도 문선왕文宣王 공자를 시조로 기세하면서 곡부 공씨 중국 종통中國宗統 편에 엮고 있다.

그리고 동국파東國派 편으로 공소孔紹를 1세로 계서系序를 시작하면서 한국 공씨의 시조라 하였다. 공소孔紹는 공자孔子의 54세손으로 본래 중국 사람이었는데 원元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 8학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처음 이름이 소昭였는데 고려 제4대 국왕 광종光宗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하여 소紹로 고쳤다고 한다.

공소가 회원군檜原君(회원은 경남 창원의 옛 이름)에 봉해지고 창원으로 사적賜籍을 받아서 처음에는 창원 공씨로도 불리었다.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때 명明나라에 동지사冬至使와 사은사謝恩使로 갔던 이성원李性源이 공씨의 족보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보이자, 왕은 창원 공씨와 곡부 공씨의 내력이 일치하므로 굳이 본관을 달리할 이유가 없다 하여, 왕명으로 곡부 공씨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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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사의 개요


곡부 공씨曲阜孔氏의 초기 정착 과정
중시조 소紹의 아들 여帤는 고려 때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평장사平章事와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을 지냈다. 그는 부俯(호: 어촌漁村)⋅은㒚(호: 고산孤山)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부는 고려 제32대 우왕 2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태학사⋅평장사 등을 지내고 조선 왕조가 개국한 뒤 한성판윤漢城判尹⋅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이태조李太祖(이성계)의 사은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태종 16년(1416년) 명나라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천추사千秋使로 갔다가 그곳에서 별세, 조선조 최초의 순직 외교 사절이 됐다. 경기도 평택시平澤市 광덕산廣德山에 소재하며 비로나자불을 모신 신복사新福寺(현 심복사深福寺)는 그의 명복과 후손들의 복운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재궁齋宮 사찰이다.

공부孔俯는 일찍이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깊이 사귀었으며 시문에 뛰어나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필원록筆苑錄의 수제首題가 되었고 ‘필랄종왕筆捋鍾王’(왕희지王羲之와 맞먹는다는 뜻)이라 일컬어졌으며 한산군이색신도비韓山君李穡神道碑, 이태조의 왕사인 묘엄존자무학대사妙嚴尊者無學大師의 탑비塔碑(양주 회암사檜巖寺 소재) 등에 필적을 남겼다. 그는 당대에 가장 청백한 선비 8명 중 으뜸이라 하여 팔청지수八淸之首라 추앙되었다.
 
고려 말 구일지수九逸之首로 추앙된 공은孔㒚
둘째인 은㒚은 우왕 8년 문과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형과는 달리 두문동에 은거하면서 이성계의 쿠데타를 불의로 규정하고 새 왕조에의 참여 권유를 거듭 뿌리쳤다. 전남 여천군 삼일읍 낙포리로 유배되어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그곳에서 별세했다.

스스로 호를 고산孤山이라 했던 공은孔㒚이 운명할 때 기러기 두 마리가 그의 죽음을 애통하듯 3일간 슬피 울며 그의 처소 위를 날아다니다가 그가 숨지자 바닷가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곳 지명 삼일읍 낙포리落浦里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후손들은 1958년 삼일읍에 여일재麗日齋란 비각을 세워 그의 충절을 추앙하고 있다. 그는 당대에 은둔한 여러 선비 중 으뜸이라 하여 구일지수九逸之首라 추앙되었다.
 
유교 통치 이념을 실천하고 기록으로 남김
곡부 공씨의 조선조 인물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이는 제11대 중종中宗 때의 강직한 문신이던 문헌공文獻公 공서린孔瑞麟(호: 휴암休巖)이 있다. 그는 중종 2년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여 승지가 되었다.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때 조광조趙光祖와 가까이 지냈던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함께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왔다. 그 후 그는 누차에 걸쳐 조정의 권신들을 공격하는 소를 올리고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주장, 한때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뒤에 경기도⋅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냈다.

공윤항孔胤恒은 정조 때 문과에 장원, 정언正言, 병마좌랑兵馬佐郞, 승지承旨 등을 역임했으며 공자의 사적에 대한 문답을 기록한 책인 「공성탄신연화孔聖誕辰筵話」를 편찬했다.

공명렬孔明烈은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나라 공묘孔廟와 공자孔子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를 편찬한 인물이다.
 
곡부 공씨에 대한 조선 왕조의 배려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는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이자 국교 구실을 하게 되어, 공자와 그의 후손인 곡부 공씨에 대한 역대 임금들의 배려도 대단했다. 태조 7년 서울에 공자묘를 지어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했으며 그 후 오늘날까지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이면 서울의 성균관을 비롯 전국 287개소의 향교에서 공자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尊大祭가 어김없이 행해져 오고 있다. 또 노성魯城⋅화성華城⋅봉곡鳳谷의 3개 궐리사闕里祠에서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이면 공자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상정일上丁日 - 음력으로 매달 첫 번째 정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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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공자의 가르치심이 아닌 것이 없으니 공부자孔夫子의 자손은 성예聖裔(성인의 후손)인 만큼 마땅히 애호의 은전을 받아야 한다.”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명종明宗,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등도 “공자 자손들을 실속 있게 등용하고 사소한 죄는 형벌을 면제하며 잡역을 시키지 말고 성균관成均館에 입교시키라.”는 등의 전교들을 내렸다.

특히 선조宣祖는 공서린孔瑞麟을 청백리로 선정,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을 주었고, 영조는 그를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하였으며, 정조는 그가 강학하던 옛터에 궐리사闕里祠를 지어 석전을 베풀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화성 궐리사다. 이 화성 궐리사에는 공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73세로 영면할 때까지의 성적을 기록한 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곡부 공씨 재실 사상재泗上齋
사상재는 곡부 공씨의 재실齋室로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곳에 모셔진 영정이 1915년 이 마을에 살던 공형표孔瀅杓 등이 중국 곡부로 가서 진영眞影을 모사해 온 것이라고 하니 그즈음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문에 따르면 공씨 후손들이 오랫동안 청령리 사수泗水(본래 공자가 태어난 곡부의 사수를 비유한 말로 형산강을 이른다) 주변에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 공씨들은 그 후손으로 약 400여 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문은 최현필이 썼다. 문선왕(공자) 영전은 사상재 뒷등성이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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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수혈斷指輸血의 효행
문헌공文獻公 공서린孔瑞麟의 손자 가운데 많은 효행자가 나왔다. 특히 공덕일孔德一은 효행이 지극하여 친병親病에 단지수혈斷指輸血을 하였을 뿐 아니라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피눈물로 옷이 젖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내며 애통해했다고 전한다.

공응조孔應祖 역시 효성이 지극해 친병親病을 간호하면서 세 손가락을 잘라 화혈和血을 올리고 친상을 당하자 여막에서 6년 동안 거처하면서 추모의 정성을 다하여 여러 고을 사람들이 경복敬服하였다고 한다.
 
항일 운동
한일합방 이후 의병대장 공성찬孔成瓚 등 의병 4인, 공태원孔奉元⋅공문덕孔文德 등 독립군, 공득평孔得平⋅공개평孔凱平 등 의열단(유격대), 공태훈孔泰勳 등 재일 항일 독립운동가, 공국선孔國宣 등 4인의 임시정부 요인, 공흥문孔興文 등 15명의 학생운동, 공달순孔達淳 등 3⋅1운동에서 옥고를 치른 16명, 기타 많은 공씨 들이 대중운동, 문화운동에 가담하였다.
 
곡부 공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공진항孔鎭恒(1900~1972) 대한민국의 기업가, 외교관, 행정가이다. 해방 직후 제1대 주프랑스 대한민국 공사와 제4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공옥진孔玉振(1931~2012)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 민속 무용가, 대한민국 1인 창무극의 선구자였으며, XX춤으로 유명하다. 2010년 11월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일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공덕귀孔德貴(1911~1997)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사업가이자 여성운동가, 신학자, 종교인, 사회기관단체인, 야당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배우자이다. 1940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김천 황금동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전도사와 신학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창씨개명을 거절하여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창원 공씨와 곡부 공씨


창원 공씨昌原孔氏는 원래 곡부 공씨다. 창원 공씨의 시조는 중국 노魯나라의 공자孔子에게서 비롯한다. 창원 공씨의 입향조入鄕祖는 고려 때 귀화한 공자의 54세손인 공소孔紹이다. 이변李釆이 쓴 창원백공소신도비명昌原伯孔紹神道碑名에는 공소가 귀화하여 창원에서 살다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씨가 창원 공씨에서 곡부 공씨로 된 것은 1792년(정조 16년) 때이다. 당시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와 사은사謝恩使로 갔던 이성원李性源이 공씨의 족보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보이자, 왕은 창원 공씨와 곡부 공씨의 내력이 일치하므로 굳이 본관을 달리할 이유가 없다 하여, 왕명으로 곡부 공씨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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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곡부 공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곡부 공씨曲阜孔氏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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