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邕 자는 ‘막다’, ‘화락和樂하다’ 등의 뜻이 있다. 우리나라 옹씨는 옥천玉川 옹씨와 순창淳昌 옹씨의 두 본관이 있다. 옹씨 본래의 본관은 옥천이다. 그러나 1930년 조선총독부의 국세 조사에서 본관을 기록할 때, 일족 중의 일부가 옥천에서 바뀐 지명인 순창으로 본관을 등록함으로써, 순창 옹씨가 생겨났다고 한다. 결국 옥천, 순창 두 본관은 동일한 본관이며, 족보에서도 두 본관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기재하고 있다. 한편 거창居昌 옹씨로 알려진 사람들도 1930년의 조사에서 당시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신고함으로써 나타났다고 한다. 순창은 전라북도 남쪽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때에는 순창현淳昌縣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 군郡으로 승격,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군으로 삼았다.
옹씨는 고려 시대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를 비조鼻祖로 받들고 판관判官을 지낸 옹몽진邕夢辰을 중흥조로 받들고 있다. 옹몽진은 음성향교지기를 지내다다 1553년(명종 8)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에 문과에 급제하고, 15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이미 급제한 당하관 문신이 중시에 합격하면 당상관을 줌)에 급제하였다. 1567년 음성현감陰城縣監에 부임하여 고을 선비 류눌柳訥과 백성의 숙폐宿弊를 상의하고 손수 진두에 서서 선정을 베풀어, 종래와 같은 과중한 부역을 감하고 민의에 의한 시책을 펼쳐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후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에 이르렀다. 옹몽진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자, 고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향교 앞에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높이 158㎝로 재료는 화강암이다. 묘소는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다.
〈옥천 옹씨 종친회〉 자료와 문헌에 따르면 옥천 옹씨의 내력에 대해 옥천 옹씨 세보인 ‘기사보己巳譜’(1629년, 인조 7)에는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낸 옹희태를 비조로 하여 옹경성邕慶星, 옹의성邕義星, 옹명정邕命廷 등 여러 선조들이 고려 시대에는 거족으로 지내다가 조선 개국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은둔불사隱遯不仕하거나 성을 감추고 있다가, 초산楚山(지금의 정읍)으로 유배되어 다시 옥천의 향리鄕吏(고려·조선 시대에 고을에서 대를 이어 오던 아전)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모든 가승家乘과 종적宗籍이 실전되어 상계를 알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은 옹몽진의 증조부 옹은邕誾을 1세조로 하여 2세조 옹식邕湜, 3세조 옹은운邕殷雲, 4세조 옹몽진邕夢辰으로 하여 새로이 가계를 세웠다. 조선 시대의 주요 인물로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군공을 세운 옹경신邕景信, 고종 때 문장과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옹택규邕宅奎 등이 있다. 근대 인물로는 전북 순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옹태룡邕太龍이 있다. 현대에는 옹경일邕敬壹(한국무용가), 옹성우(아이돌 그룹 워너원의 멤버) 등이 있다. 옥천 옹씨는 17세기에 이미 족보인 기사보를 발간한 뿌리 깊은 가문으로, 조선 시대에 문과에 2명 사마시司馬試에 3명, 무과에 1명 등 총 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화목할 옹’, ‘기뻐할 옹’ 자를 쓰는 옹雍씨는 파평坡平 옹씨, 옹진甕津 옹씨 등 두 본관이 있다고 한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서 192명으로 조사됐다. 파평 옹씨의 시조는 옹백雍伯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서 처음 나타난 성씨로 경남 창원군 능남면 안민리에 8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옹씨는 원래 순창 옹씨였는데 1908년 민적民籍 기재 때, 안민리에 살던 옹邕씨를 잘못 기재하여, 옹雍씨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