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곧 나라의 혼이다. 나라에 역사가 있듯 각 가문에도 역사가 있으니 곧 성씨姓氏의 역사이다. 지난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姓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 ‘피皮씨’는 총 15본관에 인구는 총 6,303명이었다. 피씨의 본관은 홍천 피씨, 괴산 피씨, 단양 피씨가 대종大宗이다. 우리나라의 피씨는 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그 종가 격이 홍천 피씨이다.
홍천洪川 피씨
피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중국 천수天水(감숙성)에서 계출된 성씨로 기록되어 있으며 주나라 경사卿士인 번중피樊仲皮라는 사람이 공명功名이 있어 이름 마지막 글자인 피皮 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조 피위종皮謂宗은 원래 송나라의 금오위상장金吾衛上將인데 고려조 정종 때 안렴사按廉使로 왔다가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郎을 지냈다. 그의 아들 피인선皮寅善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지자 그 뒤 후손들이 홍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피인선의 아들 피맹문皮孟文이 승지承旨를 지냈고, 손자 피원휴皮元休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고려 말에 순창현령으로 나간 피원량皮元亮은 재임기간 동안 왜구 방비에 공헌하여 유명하였다. 조선 헌종 때 학자로 유명한 피병추皮秉樞는 학문이 깊고 문장에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홍천 피씨는 조선시대에 역과譯科(통역을 뽑는 과거)에 11명, 의과醫科(의관醫官을 뽑는 잡과)에 20명, 음양과陰陽科(천문, 지리, 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는 과거)에 12명 등 43명의 전문성이 뛰어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높였다.
홍천은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원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녹효현綠驍縣으로 고치고, 삭주도독부朔州都督府(춘천)의 영현領縣(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主縣)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는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홍천은 화산현花山縣, 서기 1413년(태종 13)에는 홍천현으로 조선시대 동안 계속 이어왔다. 1945년에 인제군 기린면의 일부와 인제면의 일부를 통합해 신남면으로 개편하고, 인제군 내면도 편입시켰다. 1954년 기린면과 남면 등은 인제군에 환원시켰고, 1963년 홍천면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0년도에 홍천 피씨의 인구는 374가구에 1,143명이었다.
괴산槐山 피씨
시조 피득창皮得昌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이름을 떨쳤으며 괴산에서 정착하여 살았다. 후손들은 홍천 피씨에서 분적하고, 괴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또한 「진천군지鎭川郡誌」에 따르면 괴산 피씨는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안렴사로 왔다가 귀화한 피위종을 시조로 하여, 홍천洪川, 단산丹山, 충주忠州, 괴산槐山, 청안淸安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미보丁未譜’에는 시조가 피경연皮慶延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피기광皮起光, 호는 청피靑陂이다. 원나라 순제 때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신경위대장神慶衛大將이 되어 남만南蠻을 정벌하였으나 전세戰勢가 불리,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의 진노를 사게 되어 화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고 ‘정미보’ 세록世祿에 씌어 있다. 공민왕은 그를 우대, 괴산군槐山君으로 봉하면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아 그를 시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또 피경연의 5세손인 피득창을 시조로 삼기도 한다. 피경연과 피득창을 괴산 피씨의 시조로 여기는 경우는 피위종이 홍천군에 봉해져 홍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구분하며, 괴산 피씨는 홍천에서 분적한 것으로 본다.
괴산 피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세만皮世萬을 들 수 있다. 그는 숙종 때 적상별장을 거쳐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영조 때 정희량의 난이 일어나자 병방군 류만원 등과 더불어 적을 토평,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병절교위 훈련원 첨정·부사과에 추증되고, 성산星山(성주)에 기공비紀功碑가 세워졌으며, 그 사적이 ‘충의효열록忠義孝烈錄’에 실려 있다. 그 밖에 인물로는 피득창의 아들 피강지皮康芝가 평안도어사平安道御史를 지냈으며 손자 피정과 증손 피소는 목사牧使를 역임하여 판서에 오른 후손 피홍군皮洪君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이외에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피경송이 괴산 피씨의 가통을 지켰고 방어사防禦使에 오른 피동현皮洞鉉은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 외 통정대부通政大夫 피종남皮宗南과 판관判官을 지낸 피세만皮世萬, 통사랑通仕郎에 오른 피세담皮世淡이 유명했으며, 효자로 유명한 피운손皮雲遜, 통덕랑에 오른 피경우皮景祐, 참봉을 지낸 피봉준皮鳳俊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괴산은 본래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으로 신라 때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치고, 고려 때는 괴주槐州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충주에 속하고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3년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고쳤고, 1413년에는 괴산槐山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 1914년 괴산군, 연풍군, 청안군을 합쳐 괴산군으로 통폐합하였다. 주요 성씨로는 피皮, 방邦, 점占, 종宗, 최崔씨 등이 있었다. 괴산 피씨의 인구는 2000년 기준 693가구 2204명이었다.
단양丹陽 피씨
홍천 피씨 시조 피위종皮謂宗의 후손인 피인고皮寅古를 시조로 받든다. 피인고는 고려 조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봉군지인 단양으로 분적하였다. 단양 피씨는 문평공파文平公派와 충경공파忠敬公派 두 파로 대별된다. 단양은 충북 단양군의 옛 행정구역으로, 삼국시대에 삼국이 각축을 벌였던 지역이다. 551년(진흥왕 12)에 백제,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진흥왕이 순시할 때 세운 적성비가 남아 있다.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柰堤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이후 변천과정을 거쳐, 1413년(태종 13)에 군이 되었고, 1979년에 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의 피씨 인물
현대에 가장 크게 이름을 날린 인물로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을 꼽을 수 있다. 5월 25일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피천득은 서울대 명예교수, 수필가, 시인, 영문학자다. 수필하면 ‘인연’을 떠올릴 만큼 명작을 남겼다. 기업인으로는 프로골퍼 선수 최경주를 후원한 피홍배(80)회장이 유명하다. 피홍배 회장은 현재 주식회사 삼정 외 몇 개 회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는 중견 기업인이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피회장은 현재 괴산, 단양, 홍천, 경주 등 전국 피씨 총대종회장을 20여 년 맡았다.
피씨의 주요 세거지는 대구 매천동, 경북 상주시 외답·엄암 마을,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 충북 진천군, 경북 경주시 등이다. 특히 2000년 통계에서 충북 진천군에 거주하는 괴산 피씨는 총 21가구 53명이었다. 현재도 진천읍 금암리 금성에 일부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위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