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이 변안열이 원주 변씨의 시조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신라 균여대사均如大師의 속성俗姓이 변씨로도 전해져 변씨의 상계에 대하여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변씨들은 세 집이 한 뿌리라고 믿으며 경기도 양주, 강원도 홍천⋅원주 등 전국에 흩어져 굳건한 전통을 이어 왔다. 그중에도 원주 변씨는 조선조에 29명의 급제자를 비롯하여 숱한 명현들을 배출하였다.
임금에 대한 신하의 일편단심을 노래한 이 시조는 고려 말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이 지은 ‘불굴가不屈歌’다. 불굴가는 변안열이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포은圃隱(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 뒤이어 읊은 것으로 무신의 곧은 절개가 절절히 맺혀 있다. 문무 쌍벽의 충절가忠節歌라 할 수 있다. 원주 변씨는 시조 변안열의 이러한 불굴의 기백을 계승하여 6백여 년의 가통을 이어 오고 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그는 고려 왕조에 대한 외줄기 충성심으로 우왕禑王과 제휴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발각되었고 한양에 보내져 살해당했다. 변안열邊安㤠은 그 절개와 곧은 자취에 있어서 정몽주에 손색이 없는 충신이건만 지금껏 그의 자취가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음을 사학자들은 지적한다.
서울대 변태섭 교수는 “조선의 국시인 주자학의 관점에서 불사이군은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충신으로 기억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신에게 하는 것이고 무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는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1447년에 태어나 1524년 78세로 사망하였으며, 변수의 묘는 변수와 그의 아내 밀양 박씨의 합장묘이다. 그런데 1997년 11월 경기도 양평읍 창대리에 있던 변수의 묘에서 목우木偶 22점이 출토되었다. 신시가지 조성 계획에 따라 원주 변씨의 선산을 양평읍이 도로로 수용하여 이곳에 있던 20여 개의 분묘를 이장하기 위해 파묘를 하였고, 이때 변수의 묘에서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되었다. 출토 당시 이들 목우는 외곽과 내관 사이에 운삽과 함께 놓여 있었고, 매우 축축하게 목재가 젖어 있었다. 이들 목우는 6~1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목재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것으로 관복을 입은 남자 두 점, 평상복 차림의 남자상 일곱 점, 여자상 네 점,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여자상 네 점, 소녀상 한 점과 말 네 점으로 이루어졌다. 의복과 관모, 머리 모양, 옷의 선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당시의 복식 규모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특히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여자상은 조선 시대 향악의 변천 및 그 변화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들 목우는 1997년 출토된 복식 유물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할 때 함께 기탁되어 중요 민속자료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국내에서 처음 실물로 발견된 조선 초기의 복식 요선철릭을 포함한 변수의 묘에서 출토된 기증 유물 일곱 점을 지난 2000년 박물관 상설전시장에서 일반에게 선보였다. 이들 복식은 시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조선 초 사대부가 일상생활에서 입었던 복식과 함께 상장례에 특별히 사용한 염습옷, 엽습구까지 들어 있어 당시 복식 문화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 유물은 단령과 담호, 모자, 도화, 악수, 명목, 요선철릭 등이다.
이 중
이었다.
# 변수邊脩 묘역에서 출토된 명기明器의 가치죽은 사람의 내세 생활을 위해 장사를 지낼 때 무덤에 함께 부장하는 기물을 명기明器라고 하는데, #작은 크기로 만든 동물이나 사람, #각종 그릇, #악기, #기구 등을 총망라한다. 목우는 나무를 깎아 만든 사람 모형의 인형으로 명기의 일종이다. 이 사람 모양의 명기는 특히 명기비자明器婢子라고도 부르며, #사람 대신 무덤에 넣었던 것이다.흔히 명기라고 하면 자기나 토기 등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드물다. 지금까지 명기로 보고된 것은 그 예가 매우 희소할 뿐 아니라 제작 연대의 추정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그러나 1997년 변수의 묘에서 출토되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된 목우는 그 수량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종류 역시 다양하여 기존의 도기나 토기 중심의 명기 연구와는 다른 매우 귀중한 자료다. 또한 변수 묘역의 출토 유물은 피장자 변수의 생몰년生歿年과 피장 시기가 명확하며, #16세기 초의 복식, #목 인형 명기, #묘지 등 다양한 부장품으로 이루어져 당시 상장喪葬의 풍습 연구 및 생활상 복원 유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은 1555년 을묘왜란 때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장흥 부사가 되었고, 천문⋅지리⋅수학에도 정통해 병조판서에 오르고 양정공襄靖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변협邊協의 조카
은 남해현감南海縣監으로 있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에서 수많은 적을 사살하고 전사했다. 왜군은 변응정의 시체를 거두어 적장이지만 그 용기에 탄복, 조선국충간의담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우고 묘를 만들어 안장시켰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시신은 현재 금산 종용사從容祠 칠백의총七百義塚에 배향되어 있다.
은 훈련대장으로 임진왜란 때 경기도 방어사로 남양주에서 한강을 막아 수공 작전으로 적을 궤멸시켜 동로東路를 방위하였다. 남양주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변응성 장군 군웅제軍雄祭를 지내고 있다. 이 밖에 조선조의 변씨 인물로는 #변영청邊永淸・변수邊燧・변헌邊憲・변양걸邊良傑#이 있다. 변양걸은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강화도를 지키는 등 공을 세웠다. 변영청은 이퇴계李退溪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 대구부사 등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추앙을 받았다.
이다. 그는 갑신정변 때 대궐 안의 사정을 재빨리 알아냄으로써 독립당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일본 공사관에 연락을 취하는 등 활약이 컸다. 그 후 독립당의 삼일천하三日天下가 무너지자, 일본에 망명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메릴랜드대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미국 대학 학부 졸업생이자 현대적 농학 기술자가 된 것이다. 윤치호尹致昊를 비롯한 당시 그의 지인들에 따르면 변수는 준수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춘 탁월한 멋쟁이로 미국 유학 시절에도 어디 가나 동방의 귀족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새로운 서양 지식을 조국의 개화에 써 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로 아깝게 요절했는데, 최근 워싱턴 근교 가톨릭 묘지에서 그의 묘가 확인되어 새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다. 그가 5~6세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머님이 종기가 나서 고생을 하고 계셨다. 그는 어머님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극진히 간호했지만, 종기는 더 심해졌다.
근심에 싸여 있던 그는 꿩을 잡아 고약으로 만들어 종기에 붙이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을 우연히 알게 되어 꿩 사냥에 나섰다. 때는 설을 앞둔 한겨울이었지만 모친의 종기를 낫게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날을 헤맸으나 맨손으로 나선 중일에게 잡힐 꿩은 없었다.
눈앞에 날아다니는 꿩을 보고도 잡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찢어졌다. 끝내는 자신의 효성만 탓하면서 어머님이 걱정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별 차도도 없는 가운데,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상처만 돌볼 뿐이었는데, 난데없는 꿩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변중일은 기쁘고 놀라운 마음으로 그 꿩을 잡아 고약으로 만들어 종기에 붙였더니 신통하게도 씻은 듯이 나았다. 중일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병들이 가까운 곳에까지 다다랐다는 소문이 파다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피란을 떠났다. 그런데 변중일은 조모와 모친이 병쇠하여 피란을 하기가 몹시 어려웠으므로, 부득이 다른 식구들만 보내고 혼자 남아 두 어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하루는 조모가 드실 탕약을 달이고 있는데, 총칼을 든 적병들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무자비한 적병들은 탕약을 달이고 있는 그에게 달려들어,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창을 들이댔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나를 죽일지언정 조모는 해치지 말라 내가 죽으면 조모는 자연히 돌아가시게 되니, 탕약만이라도 드시게 한 뒤 나를 죽여라.”라고 말했다.
그렇게도 포악스럽던 적병들은 당당하고 위엄이 있는 변중일의 말 한 마디에 순간 움찔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차분히 탕약을 짜서 조모에게 드린 후, 왜병을 향해 “이제는 죽이라.”고 했다. 그러자 왜병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죽이지 않겠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효자다. 우리가 여러 곳을 지나왔지만 이런 효자는 처음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조모 곁에서 안심하고 시중을 들어라. 우리가 떠난 뒤에 다른 부대가 오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 신표를 그들에게 보이면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라며 푸른 기旗 하나와 비수匕首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당시의 기는 없어졌으나 비수는 아직까지 전해 오고 있다.
다. 그의 아들로 죽암竹巖
은 부친의 뒤를 이어 환자를 찾아다니며 치료하는 참여적인 한의사로 유명했으며, 침구학鍼灸學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3대 죽은竹隱
은 “병의 치료에는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치병필구어본治病必求於本).”라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이론에 근거를 둔 약을 처방하는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 중풍과 관절염 치료의 대가로서 특히 박정희, 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진료한 걸로 유명하다. 4대 운곡雲谷
은 중풍과 난치병 치료 분야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는데, 위급한 환자를 돌보고 돌아오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5대 녹천綠川
은 전통 한의학과 기능신경학이라는 현대 의학을 융합, 접목시키는 시도를 통해 뇌에 대한 치료법을 연구 개발했다. 또한 5대에 걸쳐 계승・발전시켜 온 각종 비방 및 경험방을 임상의학 차원에서 재배정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으며,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적이고 신경적인 증상을 다스리는 데 뛰어난 “변석홍옥고” 연구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5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 온 죽천의 후손들은 1985년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에 ‘변한의원’을 개설하였고, 2010년에는 휴대용 경옥고와 홍옥고를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