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씨 (사천)

한국주요성씨


목씨 (사천)

세계성씨총연맹본부 0 2,057
역사는 곧 나라의 혼이다. 나라에 역사가 있듯 각 가문에도 역사가 있으니 곧 성씨姓氏의 역사이다. 지난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姓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 ‘목睦 씨’성은 사천 목씨 단본으로 총 2,492가구에 8,18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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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씨의 유래


목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백제의 귀족 성씨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다. 삼국시대 백제에는 왕족인 부여씨扶餘氏를 비롯하여 목씨木氏, 사씨沙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연씨燕氏, 묘씨苗氏, 협씨協氏의 8대 성씨가 있었다(「삼국사기」와 「남제서南齊書」기록).하지만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고구려, 백제의 성씨들이 소멸되거나 변성되었는데 백제 왕족인 부여씨는 소멸되고 부여 서씨徐氏, 여씨余氏 등으로 변성되었다. 8대 성씨의 하나였던 목씨木氏 역시 목씨睦氏로 변성되었다고 한다.

둘째는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설이다. 641년(영류왕 22년)에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8명의 학사를 파견했는데 목충睦沖, 홍천하洪天河, 은세통殷世通, 위령魏齡, 방비房丕, 기모奇牟, 길령吉寧, 봉수현奉守賢 등의 8학사學士가 그들이다. 이 중 목충이 연개소문에 의한 정변으로 신라로 몸을 피해 지금의 사천泗川 지방에 옮겨 살았다고 한다. 이 밖에 형제의 우애가 화목하여 화목을 뜻하는 한자인 목睦으로 득성으로 했다는 문헌도 있다. 어찌 되었던 목씨의 항렬과 세계는 고려 시대 이전까지는 분명하지 않아 후손들은 고려 시대에 정계에 등장한 목효기睦孝基를 시조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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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의 시조와 주요 인물


고려 때는 무신, 조선 조에서는 문신

목씨는 고려 시대에는 무반으로 기반을 굳혔고, 조선 중종 때의 학자였던 11세손 목세칭睦世秤과 그 자손들이 목씨를 문반으로 다시 중흥시켰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충睦忠, 목인길睦仁吉, 목자안睦子安 등의 이름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들은 모두 무신으로서 정3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다. 목충睦忠은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고, 우왕 때 조전병마사助戰兵馬使,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여러 차례 남해안에 침범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에 이르렀다. 충의 종제 인길仁吉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숙위할 때 중랑장中郎將으로 호위하여 1등 공신이 되었다. 홍건적의 난 때는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왕의 남행에 호종하여 다시 공신이 되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우왕 때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전라도에 침범하는 왜구를 무찔렀다. 자안 역시 우왕 때에 전라도 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막았고, 평해부平海府(지금의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강릉도도체찰사江陵道都體察使로서 이를 격퇴하고 적 5명을 참하였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인 목세칭睦世秤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내고 뒤에 선조 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다. 목첨을 비롯, 첨의 네 아들 중 목서흠睦敍欽,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하여 중시조 이후 목씨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당쟁에 휘말린 사천 목씨
목씨의 유일한 상신相臣은 목서흠의 아들 목내선睦來善이다. 그는 남인의 영수 허목許穆의 문인이었다.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서 희빈 장씨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많은 파란을 겪었다. 현종 때 이른바 ‘제2차 예송禮訟’
(1)

이후 서인이 실세失勢한 데 이어 숙종 초 남인이 득세得勢하면서 형조, 호조, 예조의 각 판서를 역임하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2)

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삭직되었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에 기용,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숙종 16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차 집권하면서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으며 기로소耆老所

(3)
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조부 목첨, 아버지 목서흠과 내선 3대가 연이어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사천 목씨만이 이룩한 유일한 자랑이다. 그러나 기사환국 후 5년 만에 민비閔妃의 복위를 계기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벼슬에서 내쫓겨 귀양을 갔다.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30여 년에 걸친 서인과 남인의 정권 쟁탈전은 서인의 승리로 끝나고 남인은 중앙 정계에서 몰락하고 마는데, 남인 세력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던 사천 목씨의 주류도 정계에서 세력을 잃게 된다. 남인 몰락 후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 다툼을 벌인다. 이 때 사천 목씨 감찰공파監察公派의 목호룡睦虎龍이 정쟁의 한가운데 뛰어들었다. 경종 1년에서 2년에 걸친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참극은 목효룡의 고발에서 시작됐다. 원래 노론이었던 목효룡은 소론으로 노선을 바꾸면서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노론 일파가 경종景宗 임금을 암살하려는 모의를 진행 중”이라는 엄청난 고발을 했다. 자기도 처음에는 이 음모에 가담했었다는 목호룡의 고발에 정국은 숙청의 피바람에 휩쓸렸다. 노론 측의 정치인, 학자 수백 명이 유배, 학살되는 참극을 당했다. 모반을 고발한 목호룡은 동성군東城君의 봉작을 받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그러나 무고의 대가로 얻은 영화는 잠깐이었다. 2년 뒤 영조가 즉위하면서 신임사화는 무고라는 노론 측의 상소를 계기로 재조사가 시작돼 진상이 밝혀지면서 소론이 축출되고 노론이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불리는 이 사태 반전에 따라 목효룡은 김일경과 함께 효수되고 멸문의 보복을 당했다. 영조는 이후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폐해에 진저리를 내고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탕평책을 국책으로 밀고 가게 되었다. 이후 순조 초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뒤에 형조판서를 지낸 목만중睦萬中도 이 문중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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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 근현대 인물


사천 목씨의 근대 인물로는 목자상睦子商(1870~1910)이 있다. 그는 경기도 양주 사람으로 1906년 2월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이 되어 양주, 연천, 포천 등지에서 활동했다.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다 1909년 옥중 순국하였다. 목치숙睦致淑과 목준상睦俊相은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목연욱睦然旭(1916~1949)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1990년에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밖에 목욱상(도회의원), 목일신(아동 문학가), 목정배(한국불교학회 회장), 목요상(대한민국 헌정회 회장), 목영준(헌법재판소 재판관), 목창균(서울신학대학교 총장), 목연수(부경대 총장), 목진휴(국민대학교 교수), 목정은(강릉아산병원 병원장), 목영대(정당인), 목사균(조선일보 상무이사), 목소영(성북구의회 의원), 목은정(서울예대 교수), 목하균(KBS 방송기술연구소 소장), 목진요(연세대학교 교수), 목정균(출판사 대표), 목영진(음악감독), 목진석(프로 바둑 기사) 등이 있다(전, 현직 미구분).

사천 목씨는 조선조에서 33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어 성씨별 급제자 순위는 현재 인구 천 명당 급제자를 비교했을 때 1위이다. 비록 수는 많지 않으나 대성들과 어깨를 겨루었던 성씨인 셈이다. 사천 목씨 계파는 1958년 무술보戊戌譜에 부장공파가 새로이 추가되어 모두 11개이다. 직장공파, 감찰공파, 장악원정공파, 현헌공파, 해주공파, 사부공파, 괴산공파, 참군공파, 주부공파, 찬성공파 등이 그것이다. 사천 목씨 주요 선영先塋을 보면 대전시 유성구 덕명동,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서울시 구로구 궁동,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만송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1)예송: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조선 후기 현종과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또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논쟁이다. 1차 기해예송己亥禮訟, 2차 갑인예송甲寅禮訟.
 
(2)경신대출척:
 1680년 경신년에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이 조부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왕의 허락도 없이 궁중에서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기름칠을 해 비가 새지 않게 만든 천막)을 가져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노한 숙종은 남인을 요직에서 축출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후 서인들이 허적의 서자인 허견과 종실인 허복창 3형제(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한다. 이로 인해 허적 일가와 남인의 우두머리 윤휴가 처형되고 관련된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었으며, 정권은 완전히 서인 손에 돌아갔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도 한다.
 
(3)기로소:
 조선 시대에 정2품 이상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고위직 문신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태조 3년(1394)에 설치되어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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