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 이씨
성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 때 이부상서를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그는 우리나라 토착 이씨의 시조인 이알평의 32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주 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보다 4대가 앞선다(소판공 이거명은 이알평의 36세손). 그는 신라가 망한 후 이름을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비록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태조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는 아니나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 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대대로 호족을 이루고 살았다. 호장이란 지방 통치의 수장으로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이다. 그러다가 고려 고종 때, 시조 이순유의 12세손인 이장경李長庚이 중시조가 되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
성주 이씨는 바로 성주星州 지역에서 오랫동안 토착해 온 성씨이다. 그것은 성주 이씨의 시조 이순유가 신라 멸망 이후 성주에 옮겨서 숨어 살았다는 것과 성주 이씨가 고려에서 대대로 성주 지역의 호장 벼슬을 하는 호족이었기 때문이다.
분파와 갈래이장경 대에 가문이 번창하게 된 것은 그의 대에 와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장경은 강양군江陽君 이약李若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중앙 정치의 인맥을 확보한다. 그리하여 그의 슬하에 다섯 아들(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장경부터 8세대 안에 문형文衡(대제학) 18명, 상신相臣(정승) 15명, 문과 급제자 75명을 배출하여 여말선초麗末鮮初 최고의 가문 중 하나로 부상했다. 고려 말의 신진 유신이자 대문장가 이숭인도 그 일원이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웠으므로 원 황제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다. 따라서 중흥 시조 이장경이 농서군이 되었기에 성주 이씨를 농서隴西 이씨라고도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 성주목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 성주 이씨의 주요 파는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초은공파, 광평군파, 판서공파, 도은공파, 경무공파, 평간공파, 문경공파, 총제공파, 판운공파, 동지공파, 참판공파, 간성공파, 고은공파, 장절공파, 도정공파, 문과공파, 봉례공파, 첨추공파 등이 있다. 조선 시대 성주 이씨에서 배출된 과거 급제자를 보면 문과 102명, 무과 32명, 사마시 352명, 역과 2명, 의과 12명, 음양과 1명, 율과 2명, 주학 3명 등이다.
주요 인물성주 이씨의 주요 인물로 고려 때 이인임李仁任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이포의 아들이다. 이인임은 공민왕에서 우왕 대까지 거의 24년간 고려 정치의 최정상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친원親元 정책을 견지하며 고려의 구舊체제를 지키려 했기 때문에 신진 사대부였던 정몽주, 정도전 등과는 대립 관계였다.
이숭인李崇仁의 호는 도은陶隱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고려 말 충신 오은五隱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문과에 급제한 후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한 뒤 정몽주·김구용·박의중 등과 함께 학관을 겸했다. 이색과 명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 예문관 제학에 오르고,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당했다. 그 후 정도전이 보낸 황거정에게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 관계의 외교 문서를 도맡아 썼을 정도로 문장에 조예가 깊었다.
현대 인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 여사를 비롯하여 이병희(제1무임소장관, 국회부의장), 이용택(국회의원), 이대순(국회의원, 체신부장관), 이해봉(대통령행정비서관) 등이 있고, 재계에는 이의순(세방기업 회장), 이운일(신영섬유 회장), 이삼열(국도화학공업 대표이사) 등이 성주 이씨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