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씨 (절강)

한국주요성씨


편씨 (절강)

세계성씨총연맹본부 0 1,898

절강浙江 편片씨


시조 편갈송
절강 편씨의 시조인 편갈송片碣頌은 중국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자는 경수景修, 호는 모헌慕軒이다. 편갈송에 관한 역사는 조선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이르자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군사를 주어 돕도록 했다. 이때 편갈송은 이여송의 막료로 ‘동정명군총병사東征明軍摠兵使’가 되어 참전해 평양성 공략에 공을 세우고 개선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양호楊鎬 장군의 막료로 ‘제독군문섭병부상서중군제독提督軍門攝兵部尙書中軍都督’이 되어 재출정하여 직산稷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 승첩은 왜적의 서울 공략 야욕을 분쇄하는 중대한 계기였다. 편갈송은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마지막 보루인 울산 서생포의 왜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왜적을 이 나라에서 완전히 철수시켰다. 그 후 정응태丁應泰의 무고로 양호가 현지 파면되자 귀국하지 못하고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은거하였다. 그에게는 명나라에 두고 온 풍세豊世, 풍원豊源, 산보山甫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버지가 출병한 후 무고로 귀국 못함을 알자 가산을 정리,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우리들만 평안하게 모국에서 영화를 누리고 산다는 건 자식 된 도리가 아니다.’ 아들 3형제는 이렇게 결의하고 조선으로 나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금오산에 아버지가 은거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3형제가 그곳을 찾았을 때 편갈송은 이미 노환으로 세상을 뜬 뒤였다. 그들은 3년 동안 시묘를 하고 나서 의논 끝에 아버지의 뼈가 묻힌 조선 땅에 살기로 작정했다.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도 나주羅州로, 편산보는 전라도 김제의 만경을 거쳐 영광靈光에 터전을 잡았다. 편갈송은 울산 서생포西生浦 창표당蒼表堂에 배향되었으며, 200여 년이 지나 공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유림의 계청啓請으로 나주羅州에 감명사感明祠를 세워 공을 기렸다. 충청도 직산면 소사평과 울산 서생포에 ‘동정승첩비東征勝捷碑’가 세워졌으나 일제 때 파손돼 현존하지 못한다.
 
편씨는 원래 당나라 황족으로 이李씨였다
편씨 성이 처음 생겨난 것은 1443년 명나라 영종英宗 8년이었다. 편씨의 원래 성은 당나라 종실宗室에서 나온 이李씨였다. 편씨 족보에 의하면 편갈송의 증조 할아버지는 명나라 조정에서 한림원학사 벼슬을 했던 이지李址로 되어 있다. 이지는 주자의 스승인 이통李侗 선생의 9세손이다. 당시 세자인 영종이 궁인 원袁씨를 총애하던 중 즉위하자 원씨는 황후의 꿈을 갖고 신하들을 포섭, 황제에게 접근했다. 이지는 임금께 ‘정실을 황후로 맞는 게 천리에 마땅하다.’고 극간, 처음엔 노여움을 샀으나 끝끝내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영종은 그의 충절을 높이 치하, 일편단심一片丹心의 편片 자를 사성賜姓하고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제수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편일片鎰이 절강백浙江伯에 봉해짐으로써 오늘날 편씨들은 그들의 본관을 절강으로 삼게 되었다.
 
의병장 편성대의 활약
편갈송의 아들 편풍원이 중국에서 나올 때 부인 이씨를 데리고 나왔으나 형 풍세는 혼자였다. 그는 조선에서 오천烏川 정鄭씨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이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편성대片成大다. 편성대의 자는 형복亨福, 호는 은림隱林이다. 1605년 전남 나주군 곡강면 내동에서 태어났다. 성대는 얼굴이 백옥처럼 희고 준수한 데다 기골이 장대했다. 열다섯 살 때 화순和順에 사는 안동 김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처가인 화순으로 이사를 했다. 화순에서 고향인 나주 내동까지는 1백여 리, 그는 이사를 간 뒤 매일 새벽 백마를 타고 나는 듯 달려 부모님 묘소에 인사를 드렸다. 기골이 장대한 헌헌장부가 백마에 높이 올라 거리를 질주하는 걸 보고 화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片 한량’이라고 불렀다. 당시 화순현和順縣에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 조수성曺守誠이 살고 있었다. 그는 편성대보다 35세가 위인 선비로 일대에서 추앙을 받고 있었다. 나주에서 태어난 편성대가 화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수성과 손을 잡게 된 인연은 다음과 같다. 청 태종이 10만군을 이끌고 서울에 육박한 것이 인조 14년. 정묘호란 뒤 9년 만에 다시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해 갈 시간조차 없어 남한산성으로 올라갔고 각지에 글을 내려 의병을 촉구했다. 화순 선비 조수성이 격문을 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온 게 편성대였다. 그의 직책은 독전군관督戰軍官 겸 훈련대장이었다. 편성대의 의병 일행은 청주에 도착, 청병淸兵의 배후를 기습해 적병 아홉을 베었다. 계속 진격 중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의거 한 달 만이었다. 의분을 못 이겨 자결을 하려다 주위의 만류로 미수에 그치고 ‘대명일월大明日月’을 좌우명 삼아 69세에 일기를 마치니, 나라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했다. 당시 사촌동생 영표(편풍원의 아들)는 “하늘을 차마 볼 수 없다. 어찌 원수들과 한 하늘 아래 살겠는가.” 하고 칼로 할복자살하였다. 그에게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추증되었다. 한편 시조의 첫째 아들 편풍세는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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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강렬의 일편단심
편씨의 문혼門魂인 일편단심은 일제 치하의 조국 광복에 젊음을 사른 애사愛史 편강렬片康烈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에서 편상훈片相薰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이강년李康年 남도南道 의병 대장의 휘하에 들어가 17세에 선봉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 중 양주楊州에서 왜적과 접전, 부상했다. 1911년 평양 숭실학교 재학 때는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모살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소위 유동열·윤치호·양기탁 등이 관련되었던 ‘1백5인 사건’이다. 1912년 ‘1백5인 사건’에서 풀려나자 강렬은 선고향先故鄕인 금릉군金陵郡(김천의 옛 지명)으로 내려가 인근 청장년 30명을 모아 항일 사상을 가르치는 한편 무술을 연마했다. 이미 고인이 된 항일 독립 유공자 편덕렬片德烈씨(강렬의 동생)의 생전 진술에 따르면 강렬은 8척 장신에 얼굴이 말보다 길었고 힘세기로는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내 말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 냇물을 건널 때 한 팔을 펴서 네 사람을 매달리게 해 건네주었으며 거구인데도 가볍게 초가지붕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월산九月山을 무대로 독립군을 규합하다 일경에 붙잡혀 1년 반을 복역한 그는 다시 중국으로 떠나 산해관에서 양기탁, 남정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했다. 요즘의 특전 게릴라인 셈이다. 편강렬은 중국 내 모든 단체를 합쳐 일대 항일군을 편성하려고 동분서주하다 김성근의 밀고로 1924년 하얼빈(Harbin, 哈爾濱)에서 잡혀 7년 형을 선고받는다. 반역자 김은 이범석 장군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다. 신의주에서 복역 중 병으로 보석, 선천 미동병원에서 1년 반을 치료받다 끝내 안동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숨을 거두었다.
“내 죽거든 만주 땅에 묻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국내 이장을 말라” 이는 37세를 일기로 순국한 편강렬의 유언이었다. 지금도 그의 유해는 만주 땅 안동현 진강산 기슭 장군봉에 묻힌 채 광복 후 국내로 이장하려던 뜻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현대 인물들
“우리들의 관적貫籍은 절강이지만 진정한 본향은 경주입니다. 이 땅 위에서 400년 가까이 살았고 시조의 영원한 유택이 경주 금오산에 있기 때문이지요.” 편홍기 전 「명의회明義會」 회장의 말이다. 「명의회」는 임진·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중국 명나라의 동원東援 장군들의 후예 중 우리나라에 귀화해 정착한 자손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만든 단체다. 현재 「명의회」에 속한 귀화 성은 소주蘇州 가賈씨, 광주廣州 동董씨, 두릉杜陵 두杜씨, 상곡上谷 마馬씨, 절강浙江 서徐씨, 해주海州 석石씨, 절강 시柴씨, 제남濟南 왕王씨, 농서隴西 이李씨, 절강浙江 장張씨, 광동廣東 진陳씨, 절강 편片씨, 보양普陽 화化씨, 광녕廣寧 고高씨 등 아주 희귀한 25개 성씨들이다. 「명의회」의 기원은 조선 숙종 30년에 창덕궁 비원 안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명나라 고황제高皇帝, 신종神宗, 의종毅宗 황제를 제사하여 받든 것이 시초다. 그때 숙종은 임진·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명 장군의 후예로서 귀화한 후손들을 불러 모아 함께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를 계기로 후손들의 유대감이 형성된 것이다. 「명의회」는 이러한 선대의 정신을 자손들에게까지 이어 주는 뜻에서 1981년 5월 30일 설립되었다.

현대 인물들을 살펴보면 편영완 씨는 서울고법 판사,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거친 재야 법조계의 중진이다. 편정희 씨(한국성인복지시설협회장)는 우리나라 의정 사상 몇 안 되는 여성 의원(8대, 전 공화당)으로 ‘여성경제인협회’를 조직, 여권 신장에 힘을 쏟기도 했다. 육군 장성인 편동수 씨는 무장武將을 시조로 하는 편씨 문중에서 400년 만에 탄생된 장군이다. 그 밖에 편중렬(금산향교장의), 편재열(금천주조협회장), 편선자(서산군 영항국민학교장), 편재구(사법서사), 편재룡(인쇄업·대구화수회장), 편무실(명지대학 공과장), 편용낙(광명수지공업사장), 편인범(단국대 상경대학 교수), 편일자(서일개발 대표), 편송언(삼성전자 이사), 편도권(대자개발 전무), 편정조(공학박사, 미국원자력연구소), 편장원(육군 대령), 편부만(평통자문위원) 등이 있다.(전·현직 구분 안됨)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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