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씨

한국주요성씨


배씨

세계성씨연맹 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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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우리나라 배씨裵氏는 문헌에 총 59본관이 있으며, 2015년 조사에서는 총 400,641명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배씨裵氏 대종회 기록에 의하면 배씨의 뿌리는 2천여 년 전 신라 건국 초기의 시대로 올라간다. 배씨裵氏는 한국의 대표 성씨로 일찍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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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씨裵氏의 연원


시조는 신라 초의 6부 촌장 중의 한 분인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배씨 득성조得姓祖인 지타祗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하지만, 지타 이후 기록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배현경의 현손인 배사혁裵斯革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배원룡裵元龍은 분성(김해), 둘째 배천룡裵天龍은 성주, 셋째 배운룡裵雲龍은 달성(대구), 넷째 배오룡裵五龍은 흥해로 각각 분적되고, 다시 흥해에서 협계로 갈린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다. 바꿔 말하면 경주가 뿌리이지만 분성盆城·성산星山·달성達城·흥해興海·협계俠溪 등으로 분관된 것이다.

그런데 배씨종보裵氏宗報 제5호에 보면 배씨의 도시조가 지타공祗沱公이고 그가 한지부漢祗部(경주慶州 백률사栢栗寺 부근) 출신이므로, 모든 배씨를 경주 배씨로 일원화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른다면 관향 이름도 경주 배씨-분성파, 성산파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겠지만, 본고에서는 모든 배씨가 동계 혈손임이 분명하여 필요한 부분만 관향별로 구분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

씨족사의 개요


배씨는 발상지가 경주인 탓에 전국 배씨의 절반 이상이 경남·경북에 몰려 사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지타공은 기원전 57년의 어느 날(삼국사기 기록)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경주 알천閼川 양산楊山 기슭에서 6부가 한데 뭉쳐서 나라 세울 일을 의논했다. 그때 멀리 나정蘿井 숲에서 한 줄기 서광이 하늘로 뻗는지라, 달려가 보니 큰 박 같은 알이 있어 쪼개자 해 같이 환한 미소년이 나왔다.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 여겨 ‘밝은 누리’ ‘박혁거세朴赫居世’라 이름 짓고 거두어 기르기 13년에 임금으로 삼고, 6부가 서라벌에 한 나라를 일컬으니 신라 천 년 왕국의 출발이다.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 건국의 아버지 격인 6부 마을과 촌장에게는 한자식 마을 이름과 성이 내려졌다.” 금산가리촌은 한지부漢祗部가 됐고, 지타공은 배씨 성을 받았다. 그때 함께 성을 받은 경주慶州 이씨李氏·최씨崔氏·설씨薛氏·정씨鄭氏·손씨孫氏 등과 함께 배씨裵氏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성씨의 하나인 셈이다.

배씨는 신라·고려·조선의 왕조가 새로 열릴 때마다 개국공신을 내어 가문의 융성을 이룬 특색을 지니고 있다. 신라의 지타공, 고려의 배현경裵玄慶, 조선의 배극렴裵克廉이 바로 그와 같은 개국원훈開國元勳 중흥조中興祖다.

시조 배현경裵玄慶은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평산 신씨의 시조)·복지겸卜知識(면천 복씨의 시조)·유금필庾黔弼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의 난세를 평정하고 최초의 통일 왕조 고려를 개국한 원훈이자 명장이다. 사후 무열공武烈公의 시호가 내리고 태조 묘에 배향되어 배씨 가문은 고려의 문벌門閥로 확고한 터전을 굳혔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걸출한 후손이나 세거지를 따라 분성·성주·달성·흥해 등으로 파가 갈려 더러는 본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도시조는 모두 배현경으로 모셔, 그는 배씨의 유일 시조가 된다. 개국공신의 후예였던 만큼 배씨들은 고려조에서 융성을 누렸다. 고종조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배원룡裵元龍, 10세에 군에 들어가 17세에 중랑中郞이 됐던 배정지裵廷芝, 충렬왕 때 동북병마사를 지낸 그의 아들 배천경裵天慶 등이 『고려사高麗史』에 특기된 명신들이다.

삼별초의 주모자 배중손裵仲孫은 고려 무사의 투혼을 보인 무장이다. 삼별초의 지휘관이던 그는 고려가 60여 년에 걸친 대몽 항전을 포기하고 강화도江華島에서 나와 몽고와 강화講和하려 하자, 항전을 부르짖으며 뜻을 같이하는 삼별초 무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진도·제주로 옮겨 가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이족異族의 무력에 무릎 꿇기를 거부한 삼별초의 기개는 결코 식을 수 없는 대고(구)려 혼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지타공, 고려의 배현경처럼 조선 개국에 원훈이 된 인물은 배극렴裵克廉이다. 이성계와 함께 요동 정벌에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동참했고 개경에 돌아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새 왕조를 여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해 조선 개국과 함께 개국 1등 공신에 오르고, 성주백星州伯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새 시대의 기수 배극렴과는 대조적으로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 배문裵門의 일부에서는 끝까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추종을 거부했다. 배문우裵文祐(고려 직제학直提學)·배상지裵尙志(고려 판복시사判僕寺事)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고 학자 배을서裵乙瑞도 왕자(방원芳遠)의 사부를 삼겠다고 이성계가 여러 차례 부르는데도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배씨들은 문관 우위의 조선 사회에서 무반으로 비교적 더 많이 진출했는데, 무골 배문의 영광이 가장 빛난 것은 임진왜란에서다. 그중에서도 임란 당시 흥양 현감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크고 작은 수십 차례 해전에서 수훈을 도맡다시피 했고 나중에 경상우수사·전라좌수사·충청수사·경상우병사·병조참판에 오른 배흥립裵興立 장군이 대표적 인물이다.

같은 무렵 배설裵楔도 경상우수사·경상좌수사로 역시 이 충무공의 한 팔 노릇을 했고, 배대유裵大維는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그 밖에 배덕문裵德文·배순裵純·배용길裵龍吉·배인길裵寅吉·배승무裵承武·배수의裵守義·배건裵健 등이 모두 의병을 일으켜 구국에 신명을 바친 충의 용사들이다.

배흥립의 아들 시량時亮도 무관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사를 지냈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주장하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군을 뒤쫓아 철령에서 싸워 이기고 계속 추격해 가다 안변에서 복병을 만나 전사한 열혈한 배명순裵命純(영장營將·병판兵判 추증) 등 배씨 가문의 무인 기질은 두드러진 전통을 이루고 있다.

한편 배대유는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날려 평양 ‘기자정箕子井’ 각자刻字는 그의 글씨로 전하며, 이퇴계의 문인으로서 역시 필법이 뛰어났던 배삼익裵三益(황해도 관찰사), 유학은 물론 천문·지리·병사·의약에까지 조예가 깊었고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학자 배용길裵龍吉 등 문文에서도 배씨의 인맥은 결코 가난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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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씨와 분관


경주 배씨慶州裵氏
시조는 배현경裵玄慶. 처음 이름은 백옥삼白玉衫,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고려 태조 2년 송도松都를 서울로 정할 때 개주도찰사開州都察使가 되어 신도新都 건설에 큰 업적을 쌓았고 뒤에 대상행사조상大相行吏曹尙書 순군부령도통병마사대장徇軍部令都統兵馬使大將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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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바대로 그는 지타공祗沱公의 후손이다. 그동안의 계대繼代를 실전失傳하여 중시조가 되었고 홍지부洪祗部가 경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 이름을 경주라 하였다.

경주慶州는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라 칭하였다. 성종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쳐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로 하였으며 신라 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부·군·현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조 태종 때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으로 되었다.

경주 배씨와 관련하여 열녀 경주 배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열녀 경주 배씨의 남편은 진양 하씨 하충수河忠秀로 당진 면천에서 살았다. 남편 하충수가 1874년(고종 11년)에 병으로 위독해지자 경주 배씨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 회생시켰으나 마침내 4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경주 배씨가 남편 하충수의 장례를 모두 치른 후 식음을 전폐하여 2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열녀 경주 배씨 정려旌閭는 1890년(고종 27년)에 명정命旌을 받아 이듬해인 1891년(고종 28년)에 건립되었지만 명정을 받는 과정은 1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몇 차례나 상언을 하였으나 표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드디어 1890년 하수인의 사노 복득이 정려에 관한 원정문을 가지고 한양에 올라가 고종의 어가 행렬에 꽹과리를 치며 격쟁擊錚을 하였다. 이에 고종이 연유를 묻고는 마침내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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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배씨達城裵氏
시조는 배운룡裵雲龍, 고려조에 벼슬하여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배현경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배사혁裵斯革의 셋째 아들이다. 달성은 대구의 옛 지명이다. 대구는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인데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조 현종 때 경산부에 소속시켰고 인종 때 현령을 두었으며 조선조 세종 때에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 대구시로 승격할 때 달성부의 가창·성서·월배 등의 면이 대구시에 병합되었다.

분성 배씨盆城(金海)裵氏
분성 배씨의 시조는 여러 설이 있다. ‘기묘보己卯譜’에서는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배헌裵軒을 시조로, 고려 공민왕 때 도원수都元帥로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진 배원룡裵元龍을 3세로 계통을 세웠다. ‘정해보丁亥譜’에서는 신라 초 박혁거세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금산가리촌장 배지타를 시조로,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중조로 삼으면서 배원룡은 그의 5세손으로 소목昭穆(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을 삼았다. ‘임술보’ 역시 이와 같으나 ‘무인보’는 시조는 배지타인데 그 뒤의 계대를 밝히지 않고 신라 성덕왕 때 본피군本彼君에 봉해진 배부裵賦를 1세조로 하면서 배현경은 그의 6세손, 배원룡은 16세손으로 계세를 세워 놓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배씨가 태사공 배지타에 연원을 두면서 후손들이 번성해짐에 따라 세거지와 선조의 작호爵號를 따라 분관하거나 분파되어 분성·성산·달성·흥해 등 각 분관 성씨와 경주처사공파慶州處士公派·성산복사공파星山僕射公派·화순진사공파和順進士公派·함흥교서공파咸興校書公派·협계합문사인공파俠溪閤門舍人公派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사정을 말해 준다고 할 것 같다. 아무튼 ‘신유보辛酉譜’에 따르면 수관조受貫祖(관을 받은 조상)를 배원룡裵元龍으로 하여 기세조起世祖로 계대하고 있다. 발간사에는 ‘시조인 신라 한지부장공漢祗部長公 이래 고려 건국에 수훈을 세운 태사무열공太師武烈公이 중세현조中世顯祖이며 수관대조受貫大祖인 분성군盆城君’이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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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성 배씨 주요 인물
배씨 가문에서는 주요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배명원裵明遠은 조식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문장행의文章行誼로 추앙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관병마절제사鎭管兵馬節制使가 되어 수성守城하다가 순직했다.

배형원裵亨遠은 전원에 은거하여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명원明遠과 함께 종군, 원종공신2등原從功臣2二等에 책록되었다. 전란 후에는 임천林泉에 은거하였는데, 유일遺逸로 선교랑宣敎郞·김해교수金海敎授에 기용되었다. ‘유일遺逸’은 조선 초기에 만든 제도로, 초야에 묻힌 재능 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배대유裵大維는 선조 2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사府使를 지낸 이영李英과 함께 창의했고,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여 적의 육로陸路를 차단하였다. 그 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고자 상소하였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복직되어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동국명필안東國名筆案에 입록入錄되었고, 저서로 ‘모정집慕亭集’이 전한다.

배일장裵一長은 문집 「심경보사心經補辭」를 저술했고, 능참봉직陵參奉職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구한말 망국亡國 후 독립운동에 종사한 인물로는 배동석裵東奭, 배덕수裵德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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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배씨星州裵氏
성주 배씨星州裵氏 시조 배위준裵位俊(무열공 배현경裵玄慶의 8세손)은 고려 시대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다. 그의 5세손 배인경裵仁敬이 고려 충선왕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고, 충숙왕 때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다. 11세손 배극렴裵克廉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어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성주 배씨 대표적 집성촌은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등이다. 성주 배씨로 주요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배응경裵應褧(1544년~1602년)은 1576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랑을 거쳐 청도 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 수백 명을 포획한 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595년(선조 28년) 순천 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나주 목사로서 금산을 수비하였다. 1601년 대구 부사를 지내고,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흥립裵興立(1546년~1608년)은 1572년(선조 5년)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조방장으로 이순신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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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순裵命純(1597년~1637년)은 1624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하고 정묘호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서 후금과 싸워 공을 세웠다.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감찰監察·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보성군수寶城郡守·절충장군折衝將軍·함경북도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덕원도호부사德源都護府使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영장營將으로서 철수하는 청나라 군사와 철령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퇴각하는 청나라군을 추격하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전사하였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

흥해 배씨興海裵氏
시조 배경분裵景分(무열공 배현경裵玄慶의 7세손)은 고려 시대에 겸교장군檢校將軍을 역임했다. 그의 6세손 배전裵詮이 고려 충혜왕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적曺頔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삼중대광첨의평리三重大匡僉議評理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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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 배씨昆陽裵氏
시조 배맹달裵孟達(달성군 배운룡裵雲龍의 13세손)은 조선 세조 13년(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서훈되고, 가정대부嘉靖大夫 행호분위상호군行虎賁衛上護軍에 올랐으며, 곤산군昆山君에 봉해졌다. 이를 계기로 후손들이 본관을 곤양昆陽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배맹달裵孟達, 배숙흥裵叔興, 배사종裵嗣宗 등이 있다. 경상남도 사천군泗川郡에 속한 곤양의 옛 지명은 곤산昆山으로 고려 때 곤명현昆明縣이라 하였고, 1437년 진주의 금양부곡과 합하여 곤양으로 고쳤다. 그 후 곤양면昆陽面, 곤명면昆明面으로 바뀌어 왔다.

함흥 배씨咸興裵氏, 화순 배씨和順裵氏, 협계 배씨俠溪裵氏, 남해 배씨南海裵氏
함흥 배씨 시조는 배덕수裵德秀이며 조선 시대에 교서관校書館 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화순 배씨는 시조가 배련裵練이며 고려 시대에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였다. 협계 배씨의 시조는 배진裵縉이며 고려 시대에 합문사인閤門舍人을 역임하였다. 남해 배씨南海裵氏는 시조가 배순裵循이며 조선 성종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감사京畿監査를 역임하였다.

태사공太師公 지타祗沱에 뿌리를 둔 우리나라 배씨는 번창해짐에 따라 세거지 이름과 조상의 작호를 연유로 삼아 여러 본으로 분관되었는데, 특기할 만한 점은 한국의 역사적 변곡점에서 배씨가 늘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국가 형성에 있어서 항상 배씨가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하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2) 위키백과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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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씨연맹
배裵씨인가, 배裴씨인가?
배裵 자와 배裴 자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국조 단군이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 후 하늘로부터 비의남아緋衣男兒를 얻게 되었고, ‘비緋’자에서 ‘사糸’를 빼고 ‘의衣’자를 붙여 배裴를 성으로 삼았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조선조에 임연재 배삼익이 진사시에서 초서로 쓴 ‘배삼익裵三益’을 호명자가 ‘쇠지개衰之蓋’로 잘못 호명하였는데, 명종이 ‘배裵’자의 꼭지를 위로 써서 실수가 생겼으니 앞으로는 꼭지를 내려쓰라는 분부가 있어 그로부터 ‘배裵’를 ‘배裴’자로 쓰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한자 자전을 보면, ‘배裵’자와 ‘배裴’자는 같은 자로서 옷이 긴 모양(장의모長衣貌), 옷이 치렁치렁함, 천천히 이리저리 거닐음(배회徘徊), 성姓, 나라 이름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배裴’자가 ‘배裵’자의 본자本字로 되어 있기도 하고 고체古體로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비곡직을 따질 필요 없이 같은 자로 보면 된다. 1982년 배씨 종친회에서는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배裵’자로 통일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

족보를 볼 때 필요한 기초

배환裵桓 선생과 도깨비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정자터
옛날 안동군 풍산 고을 개평리에 배환裵桓이라는 감사 한 분이 하루는 친구 집에서 여러 선비들과 어울리다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강 건너 서쪽 단호리의 아름다운 기암절벽을 보고 시를 읊다가,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에 깨끗한 백사장을 베개 삼아 배 감사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시원한 강바람에 산책을 나왔던 도깨비들이 배 감사가 죽은 줄로 알고 장사를 지내 주기로 하였다.



도깨비들은 배 감사를 메고 강물을 건너 가파른 절벽을 정신없이 올랐다. 그러다 힘이 든 도깨비들이 잠시 쉬던 중, 한 도깨비가 “여기가 좋은 묘터가 되겠는걸. 우리 여기서 장사 지내는 게 어때?”라고 하자 또 한 도깨비는 “여기는 좋은 정자터지 묘터가 아니야.”라고 했다. 이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잠에서 깬 배 감사는 죽을힘을 다해 “네 이놈들, 뭣 하는 짓들이야? 내가 죽긴 왜 죽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자, 놀란 도깨비들은 절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 절벽 위에서 집채 같은 커다란 바위가 굴러떨어져 정자를 짓기에 알맞은 터가 생기게 되었다. 도깨비들 때문에 좋은 터를 얻은 배 감사는 여기에 정자를 짓고 풍월을 읊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안동군 남후면 단호리, 굽이치는 낙동강 가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바위가 떨어진 자리에 지은 정자라 하여 ‘낙암정落巖亭’이라 부른다고 한다.
세계성씨연맹
중국의 배씨裴氏
한국의 배씨는 조선 중기부터 ‘배裵’ 자를 사용해 오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한자 ‘배裴’ 자를 사용한다. 중국의 배裴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인물 백익伯益의 후예로 영성嬴姓 계통이며 비자非子의 12대손인 진환공秦桓公의 아들 후자침后子鍼을 시조로 삼는다.

중국 중세의 저명한 문벌 귀족 중 하나로, 하동 배씨河東裴氏로 시칭時稱되었다. 배씨는 진秦, 한漢의 고대부터 기반을 닦아 위魏, 진晋을 거쳐 수隋, 당唐 때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렸다. 후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배裵’ 자가 본래의 글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 배씨 중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배수裴秀(224~271) - 서진西晋의 정치가 배수裴秀는 정치 쪽에서 일생 동안 활동했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창제한 ‘제도육체製圖六體’는 지도를 만드는 이론으로, 중국 고대 지도제작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수학적, 과학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이론은 이후 명나라 말기까지 1,400여 년간 활용된다. 그가 쓴 「우공지역도禹贡地域图」 18편은 중국 최초의 지도학 전문 서적이다. 영국의 과학기술사가인 니담은 그를 중국 지도제작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배수는 유럽 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고대 지도사상 동방과 서방에서 각각 빛나는 별이었다.

배요경裴耀卿 - 중국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환지煥之이며 개원지치를 이룩한 현종玄宗의 경제 관료였다. 배요경은 681년에 배수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동자과에 합격하였다. 배요경은 713년에 장안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장안에는 관부의 명의로 세대별로 할당해서 물품을 구매하는 법령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었다. 배요경은 부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미리 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그 폐단을 직접 해결하는 등, 장안 현령으로 재임하면서 관대하고 엄격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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