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의 기원
진양晉陽 화씨 시조 화명신化明臣은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 중엽 정유재란 때 귀화했다. 중국의 낭야琅琊 사람인 그는 명나라 중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본래의 성은 화花씨로 이름은 화광신花光新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된 지 4백여 년이 지났으나 족세는 아직 많지 않다. 16대를 이어오며 전국에 940여 명이 살고 있다. 관향인 경남 진양을 중심으로 경남 지방과 부산시 일원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화씨의 세계는 명나라 개국 공신인 화운룡花雲龍에서부터 비롯된다. 대사마大司馬(병조판서) 대장군을 거쳐 벼슬이 영상서사領相書司에까지 올랐으며 그의 아들 화선花善은 상서도성尙書都省 장관인 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명나라 말기에 만주의 여진족女眞族이 강성해지면서 북경을 점령한 청군이 낭야에까지 밀려들자 화운룡의 7세손孫인 화명신은 “어진 사람은 기회를 알고 행한다.”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칭송 받던 조선으로 일가를 이끌고 망명했다. 경기도 광주廣州 교외의 소영대沼靈臺에 터를 잡고 정착한 그는 이름도 성도 숨기고 살았다. 조선 성종成宗 때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고 성종은 중국의 화씨가 조선에 귀화한 것은 ‘향화向化의 의리’라며 화化 자를 성으로 하사했다. 경성군慶城君으로 봉해진 그는 도승지都承旨에 기용됐다.
진양晋陽에 터를 잡은 화섭化燮
이후 화씨는 득성得姓 시조 이후 사성보첩賜姓譜牒을 잃게 되었다. 헌종 때 후손들이 안동부에 보존돼 있는 족보를 가까스로 찾아냈으나 원본이 크게 훼손되어 정확한 선계先系를 밝히지는 못하고 화명신의 6세손으로 알려진 화섭化燮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화섭은 강월도 영월에서 중국 귀화인의 후손인 시柴, 마麻, 천千씨와 더불어 “선대의 고향에서 먼 곳에 와 있으니 고락을 함께 하자.”며 도원결의로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그는 원병 14만 명을 이끌고 온 명나라 마귀 제독을 만났다. 그는 마귀의 군막을 찾아가 “신주神州(중국)의 무신武臣 집단 후손인 나에게 병력을 주면 왜군을 무찌르는 선봉에 서겠다.”고 요청했다. 마귀는 화섭을 중군 선봉장으로 삼고 건주기병建州騎兵 1만8천 명을 거느리게 했다. 그는 명조의 무신 후예답게 이들 병력을 지휘, 울산에 포진한 왜군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이후 곳곳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웠다. 1598년 7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책록되고 영양英襄의 시호가 내려졌다. 우리나라에 건너와 가문을 연 이래 처음으로 조선의 훈신勳臣이 된 것이다. 전주 이씨를 아내로 맞았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경남 진양晋陽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 그래서 진양 화씨가 되었다. 그곳에서 여생을 마친 중시조 화섭은 진양 땅 명석면鳴石面의 용장龍藏골에 묻혔다. 그의 외아들 화봉상化夆祥은 선대의 후광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품계)의 가자加資(조선 때 정3품 통정대부 이상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다. 진양 화씨는 임진왜란 때 화섭 외에도 화춘化春(2등공신), 화희성化希成(3등공신), 화연세化連世(3등공신) 등이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진양 화씨는 득관조 이후 안동 권씨, 파평 윤씨, 성산 이씨, 김녕 김씨, 연일 정씨, 창녕 조씨, 진양 강씨, 의성 김씨 등 영남의 명문거족들과 통혼通婚하여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며 양반 가문의 전통을 굳혔다. 진양晋陽은 진주晉州의 옛 지명으로 1995년에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양 화씨 주요인물
5세손 화일취化日就는 영조 때 1등공신에 오른 화씨의 유명인물이다. 1728년 이인좌 일파가 권세를 잡기 위해 청주 관아를 습격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화일취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는 양무원종일등공신록楊武原從一等功臣錄에 올랐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에 올랐다. 초기 화씨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화영준化英俊, 자헌대부資憲大夫 화일장化日長, 가선대부 화일희化日熙, 절충장군折衝將軍 화동휘化東輝 등이 비록 등과하지 못했으나 가자加資 등으로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에 오르는 등 가문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만주족滿洲族의 누르하치가 청淸을 일으켜 명나라가 망하고 청태종淸太宗(홍타이지)이 조선에 남아 있는 명조유민明朝遺民들을 모두 청나라로 강제 송환할 것을 요구하면서 진양 화씨 등 명조유민들은 주로 인적이 드문 산간벽지에 숨어 살아야 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이들 명조유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신변을 보호토록 했으나, 임란 당시 명군들의 횡포에 시달려온 백성들은 오히려 명조유민들을 냉대했다. 특히 지방관리들은 차별대우를 하고 무거운 세금에 부역을 시키기도 했다. 영조34년(1758)에 이르러 사간원사간 유건柳健의 “귀화민들에 대한 차별대우 등 폐단을 없애고 올바르게 보살핌이 합당한 일”이라는 상소에 따라 영조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조선의 신하가 된 명조 귀화민의 후손들을 부역케 하거나 세를 거두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 후 화化씨를 비롯한 명조유민들에게는 일체의 조세와 부역이 면해졌다.
9세 화덕봉化德鳳은 헌종조 때 숨은 선비로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아예 부귀와 벼슬을 멀리하고 산촌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의 아들 상혁相赫은 중국 태고시대에서 명조에 이르기까지 당대 문장가들의 시문詩文을 집대성한 ‘기중문집箕中文集’을 필사본으로 남겨 가문에 큰 자랑이 되고 있다.
10세 화창도化昌道의 부인 진양晋陽 강씨姜氏는 남편이 질병으로 쓰러지자 단지斷指수혈로 목숨을 건지게 했다. 보리 흉년에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참상에 첩첩산중을 헤매며 영약초를 구해다 달여 먹이는 등 남편의 병구완에 30여 년간 극진한 정성을 바쳐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기록됐고 ‘열부찬양문烈婦讚楊文’이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근세에 이르러 화씨의 대표적인 유학자 화만선化萬宣, 화명길化明吉 등이 유서 깊은 진주향교의 전교典校(향교의 책임자)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하동, 산청 일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서는 종교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던 화진선化進先은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선생은 2010년 3월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해방 후에도 화씨는 선조 때부터 터를 잡은 경남지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 16세 종손까지 이어오고 있다. 일제 때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다가 해방 후 호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무착오로 화化씨가 아닌 하河씨로 등재돼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화씨는 그동안 뿔뿔이 흩어진 일가 간에도 내왕이 끊겼으나 최근 서울, 강원도 등지의 일가를 찾아내 결속을 다지고 후손들이 가장 번창한 진양을 중심으로 ‘숭묘록崇墓錄’을 간행하고 ‘인광재仁匡齋’를 건립하는 등 조상의 빛나는 얼을 되새기고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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