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 있는 선비 정신을 이어온 의성 김씨는 행동하는 명문으로, 영남 독립지사의 대부분은 의성 김씨 가문이다. 이번 달은 단일 문중에서 최대로 많은 독립유공훈장자 60여 명을 배출한 의성 김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씨족사 개요
의성 김씨의 시조 김석金錫과 후손
시조는 김석金錫,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외손이다. 왕건의 딸 신란공주神鸞公主(일명 낙랑공주)가 어머니이다. 신란공주는 왕건의 셋째 부인 신명태후神明太后 충주 유씨忠州劉氏의 소생이다.
김석은 고려 초 경종 때 국방과 백성들의 구휼에 공을 세워 식읍 300호를 하사받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의성을 관향貫鄕으로 정한 것은 시조 김석이 의성군에 봉해짐으로써 자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삼았다고 을축보乙丑譜 세록世錄에 쓰여 있다.
의성 김씨는 의성의 옛 이름이 문소聞韶인 관계로 문소 김씨聞韶金氏라고도 한다. 의성은 원래 조문국이라고도 했으나, 929년(고려 태조 12년)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막다가 전사한 홍술 장군의 충정을 기려 ‘의성義城(의로운 성)’으로 지명이 바뀐 것이다. 그 유적지로는 의성향교와 조문국 경덕왕릉이 유명하다.
의성 김씨 종택 - 의성 김씨 종택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 뽑은 4대 길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의성 김씨 족보에는 김석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김씨천년사新羅金氏千年史」를 비롯한 경순왕 후손에 대한 기록에는 경주 김씨의 분관조가 되는 명종鳴鍾이 셋째 아들, 은설殷說이 넷째 아들로 되어 있으므로 김석金錫이 다섯째 아들이 된다. 이러한 족보의 기록은 당대의 것이 아니고 금석문에서 확인되지도 않으므로 어느 것이 바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인물로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君에 책봉된 이는 시조 의성군 김석을 비롯해 김홍술金弘術·김용비金龍庇·김용필金龍弼·김굉金紘·김영렬金英烈·김광부金光富 등 7명이고, 시호를 받은 사람은 충의忠毅 김용수金龍珠·양소良昭 김영렬金英烈·문원文元 김원金元·문민文敏 김남보金南寶·문절文節 김용초金用超·문경文敬 김안국金安國·문목文穆 김정국金正國·충강忠剛 김제민金齊閔·문충文忠 김성일金誠一·문정文貞 김우옹金宇顒·문절文節 김응택金應澤·정민貞敏 김지수金地粹·문민文敏 김덕선金德善 등 13명이다.
의성 김씨義城金氏에는 조선조에 96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는 경주 김씨慶州金氏·광산 김씨光山金氏·연안 김씨延安金氏·김해 김씨金海金氏·청풍 김씨淸風金氏 다음으로 많은 수다.
의성 김씨 분파
의성 김씨의 분파는 9세조를 분파조로 하여 5개 파로 나누어진다. 김용비金龍庇의 후손이 첨사공파詹事公派, 김용필金龍弼의 후손이 수사공공파守司空公派, 김용수金龍守의 후손이 충의공파忠毅公派, 김성단金成丹의 후손이 찬성공파贊成公派, 김흥金興의 후손이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로 나누어진다.
의성 김씨의 분관
광주 김씨廣州金氏
광주 김씨廣州金氏는 의성군 김석의 6세손 김언미金彦美의 셋째 아들 김녹광金祿光을 시조로 한다. 그는 1236년(고려 고종 23년)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시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가 봉군된 광주를 본관으로 삼아 문호를 열었으며, 김녹광의 아들 김굉金閎이 감찰어사를 지내고, 손자 김훤金晅은 당대의 명신으로 명성을 떨쳤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훤은 1269년(원종 10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원제의 힘을 빌려 권신權臣 임연林衍 일당의 역모를 저지시켰고, 이듬해 금주 방어사로 나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고, 후에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까지 이르렀다.
조선조에는 공조참의를 역임한 김차문金次文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김차무金次武 형제가 유명하다. 한말에 와서는 김진성金振聲·김석창金錫昌·김상윤金相潤을 비롯한 항일 투사를 배출하여 충절의 전통을 이어 가문을 빛냈다.
개성 김씨開城金氏
개성 김씨의 시조 김용주金龍珠는 의성군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아우로, 105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진의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추충공신이 되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로 후손들이 의성 김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개성으로 삼았다. 묘소는 개성 용수산 중봉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조선조의 김자양金自陽, 그의 아들 김황金滉, 그리고 화가로 김응환金應煥,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이 유명하다.
고령 김씨高靈金氏
고령 김씨는 의성군 김석의 장손 김의金宜의 넷째 아들인 김남득金南得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고려 때 사은사로 원나라에 가서 예부상서를 명命받고 환국한 후에, 왕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자, 이름을 김남득으로 하고 본관을 고령으로 하였다. 고려 공양왕 때 김남득의 아들 김무金畝 소생의 손자 김사행金士行, 김사문金士文, 김사충金士忠, 김사신金士信과 중종 때의 김수金銖, 병조참판을 지냈던 김구金鉤, 현종 때 토산 현감을 지낸 김초중金超重 등이 유명하다.
설성 김씨雪城金氏
설성 김씨의 시조 김지선金之宣은 개성 김씨로 분적한 김용주金龍珠의 증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설성雪城에 세거하면서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개성 김씨에서 분적하고 지선을 1세조로 삼아 관향을 설성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 지선의 아들 김원金源이 고려조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상장군으로 무훈을 세우고 문원文元이란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김신주金臣株는 사재감정을 역임하여 부자가 함께 명성을 떨쳤다.
적성 김씨積城金氏
적성 김씨의 시조 김상환金尙煥은 의성 김씨의 시조인 의성군 김석의 후손으로 김몽립金夢立의 아들이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그는 1636년생으로 거주지는 평양이다. 166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적성으로 한 연유는 상고할 수 없으나 급제 당시의 본관이 적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선대부터 적성에 살았기 때문에 세거지명을 본관으로 삼은 듯하다.
삼화 김씨三和金氏
삼화 김씨의 시조인 김통金統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의 후손인 의성 김씨 김호지金好智의 둘째 아들이다. 김통은 1435년(세종 1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정지가 되고 이어 저작, 박사를 거쳐 형조좌랑으로 재직 중,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교리를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렀다. 그 뒤 성균관 직강을 거쳐 1451년 예조정랑에 올랐으나, 영릉소상제英陵小祥祭를 잘못 주관했다고 탄핵받아 면직되었다. 평소 벼슬살이를 즐겨하지 않았던 그는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 평양 부근으로 낙향, 자연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고려조의 인물
원종조에 과거에 올라 충선왕 때 찬성사贊成事에 오른 김훤金晅과 그의 아들 김개물金開物이 있으나 ‘임술보壬戌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의 증손 김태권金台權은 좌사윤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거두金居斗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간본重刊本의 발문을 쓸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김거익金居翼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했다.
김광부金光富는 김용비金龍庇의 셋째 아들 김영金英의 손자로 우왕 5년 영남순문사嶺南巡問使 겸兼 합포도원수合浦都元帥로서 침입한 왜구와 싸우다가 가수현嘉樹縣 서정西亭에서 전사, 병조판서兵曹判書·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으로 추증되었다.
찬성공파贊成公派의 파조가 되는 김성단金成丹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김용초金用超는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무예에도 뛰어났다.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정도전鄭道傳 등 15명과 함께 공훈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조선 개국 후 영남병마도절제사嶺南兵馬都節制使를 제수받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김영렬金英烈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박포朴苞의 난 때 신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조의 인물
의성 김씨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며 조선 인종仁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연산군 7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2년 뒤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로 전라도관찰사로 있다가 기묘사화 때 대사헌 조광조의 일파라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관직은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예조禮曹·병조兵曹의 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좌찬성左贊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다.
김안국은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병법·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어린이의 학습서이며 오륜의 윤리를 서술함), 「모재집慕齋集」, 「모재가훈慕齋家訓」 등의 저서와 「이륜행실二倫行實」, 「창진방瘡疹方」 등의 편저서를 남겼다. 조광조와 같이 지치주의至治主義(인간 세상을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 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교 교리)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문하에서 서하河西 김인후金麟厚,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 등이 배출되었다.
모재 김안국의 부조묘不祧廟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 있다. 부조묘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어야 하지만 공훈이 있는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그의 동생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역시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중종 4년 문과에 급제, 호당湖堂*에 뽑혔고 황해도·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병조·형조참판을 지냈다. 기묘사화 때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다가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지냈다. 저서에는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기묘당적己卯黨籍」, 「사재집思齋集」 등이 있다. 사재 김정국 묘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묘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3번지에 있다.
*호당湖堂 - 조선조 세종~숙종 간대에 시행된 인재 양성 제도의 하나다. 글재주와 덕이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초급 관리 중에서 대제학이 엄히 선발하여 장기 휴가를 주어서 공부, 즉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래서 이를 독서당讀書堂 또는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내려서 독서하게 한다)라고도 불렀다.
영남 유림의 거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의성 김씨 가문의 내앞(안동 천전리川前里) 문중 중흥시조는 김진金璡인데, 다섯 아들 중 넷째가 바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1590, 선조 23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황李滉 문하에서 공부하고 호당湖堂에 뽑히기도 했던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사성司成으로 통신부사가 되었는데, 동인이었던 그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보고했던 서인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침략의 위험이 없다고 보고했다. 2년 뒤 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의 책임을 추궁했으나, 같은 동인東人인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화를 면했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일대가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는데,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유성룡 등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喪禮考證」,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학봉집鶴峯集(1627년 사후 문집)」이 있다.
조선의 3대 여류 시인 임벽당林碧堂 의성 김씨
임벽당林碧堂 의성 김씨義城金氏(1492~1549)는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중기의 3대 여류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녀는 부여 중정리에서 아버지 김수천(한성서윤, 병조참관)의 장녀로 태어났다. 임벽당은 김축金軸으로부터 학문을 닦고 18살 되던 해에 비인 도화동(현 남당리) 기계 유씨杞溪俞氏 여주공汝舟公에게 출가했다. 이때 임벽당의 시아버지 서호공西湖公은 사육신 사건과 연루된 집안이라 하여 핍박과 수난을 당하였다. 결혼 9년 만에 기묘사화를 당하여 현량과에 천거된 부군이 벼슬을 버리고 비인 남당리로 낙향하여 고달프게 살았다. 그러나 임벽당은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시詩, 문文, 서書, 수예 등 규방 예술에 힘을 기울였다.
임벽당의 시문은 사후 1683년(숙종 9년)에 서장관 애산艾山 김두명金斗明이 중국에 다녀올 때 명나라 전겸익錢謙益의 열조시집列朝詩集이란 책자를 가져오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열조시집에는 <별증別贈>, <빈녀음貧女吟>, <고객사賈客詞> 등 임벽당의 시 3수가 수록되어 있다.
학봉 김성일 이후 의성 김씨 가문
김우옹金宇顒은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명종 22년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그와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20권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풀려나 부호군副護軍으로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를 건의했고, 그 후 이조·예조·병조참판吏曹·禮曹·兵曹參判,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했다.
김용金涌은 선조 때 과거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했다.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쟁,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이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598년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삭직削職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선산부사善山府使 등 외직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태상사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김지수金地粹는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해 부령富寧으로 귀양을 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예·병조의 낭관郎官을 지냈다. 「조천록朝天錄」은 인조 4년 정사 김상헌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가면서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김성구金聲久는 부제학 김우굉金宇宏의 후손으로 지평持平·정언正言·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후손에서 문과 급제자가 19명 나왔다.
김방걸金邦杰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복제문제를 거론한 ‘기사소己巳疏’를 올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승지承旨·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나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을 탄핵했던 죄로 동복으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리校理 김성택金聖澤의 아들 김낙행金樂行은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귀양 가게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귀양지로 따라가 10여 년간 모신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효자로 이름이 있었다.
김굉金紘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1년 문과에 급제, 전적·지평·단양군수·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명필·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단양군수 때 이속들의 시폐時弊를 논한 만언소萬言疏가 명문으로 꼽히고, 중요한 외교문서를 많이 썼다.
김연동金鉛東은 관찰사 김성구金聲久의 증손으로 정조 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觀察使·승지承旨·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는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되기도 하였다.
세계성씨연맹
의성 김씨들의 호국 활동
의성 김씨의 후손에서 구한말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운 열사·의사로는 다음의 인물을 들 수 있다.
김도화金道和는 을미사변(1895년) 직후 곽종석郭鍾錫·김흥락金興洛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서상설徐相說 등과 연합전선을 펴서 일본군과 싸운 인물이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는데 한일합방 후 일본 총독부에서 사문斯文 진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우대, 식민 통치에 이용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이때 그를 찾아왔던 고교형高橋亨은 집 대문에 ‘합방반대지가合邦反對之家’라는 글씨를 써 붙이고 돌아갔다 한다.
김하락金河洛도 을미사변 때 창의하여 운현雲峴·노루목·이현梨峴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남한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뒤에 영덕盈德 오십천五十川 전투에서 순국했다. 그의 「정토일기征討日記」는 당시 의병 활동의 기록이다.
김동삼金東三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고, 이준李儁·여준呂準 등과는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정臨政 노동국 총관이 되기도 하고, 또 여러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통의부統義府를 조직, 총장이 되었다. 1925년 정의부를 조직, 행
정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일경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김용환金龍煥은 학봉의 13대 종손으로 파락호破落戶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노름꾼으로 철저히 위장하여 독립군 자금의 공금책 역할을 했다. 700마지기 농토를 팔고, 종가를 세 번이나 팔았다. 이런 행적이 뒤늦게 알려져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유림으로 일제 시대 반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애국자요 학자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疏’를 올렸고, 1908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비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전국 유림 대표 137명의 명의로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 이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기 위해 상해로 갔었으며, 그곳에서 임정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다음 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 기관지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서민일보를 발간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손문孫文과 교섭,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하기도 하였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가 1927년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잡혀 본국으로 압송, 징역 1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어 버렸다.
8·15 광복 후 유도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고, 초대 성균관 관장과 성균관대 학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고문을 보냈다가 40일간 옥고를 치렀고 이시영·김성수·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1962년 노환으로 별세한 후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만삭의 임산부도 망명길, 식민지에서 출산하는 것 거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내앞 문중은 또 한 번 자기 혁신을 한다. 계몽주의자들이 대개 개량주의 친일파로 전락했지만 이들은 비타협적 투쟁 노선을 선택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협동학교의 주역이었던 이상룡, 유인식, 김대락이 문중을 이끌고 남만주로 집단 이주를 단행했다. ‘일제에 세금을 낸 술로 제사를 지내고, 가옥세를 낸 집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앞 문중에서는 22가구 50여 명이 망명길에 나섰다. 김대락의 손부와 손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1910년 12월 24일 안동을 출발해서 다음 해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했다. 이들은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세웠으며 군대를 조직했다. 당시 경학사의 사장은 이상룡이었고 이희영이 내무부장, 김동삼이 교육부장이었다.
망명객들은 벼농사를 개척했지만 물이 차서 실패를 거듭했다. 풍토병이나 마적과도 싸워야 했다. 이상룡은 한인 마을을 개척하고, 청년을 끌어모아 독립운동 전진기지를 개척했다. 김동삼은 이들을 기반으로 서로군정서와 같은 군사 조직을 만들어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전투에 내앞 사람 여럿이 참전했다. 1920년 일제가 서북간도에 있는 조선인 마을과 학교를 불태우고 학살할 때 내앞 문중도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삼광학교 교장이며 김동삼의 동생이었던 김동만이 이때 죽었다. 이른바 ‘경신대참변’이다. 1914년 김대락이 망명지에서 향년 70세로 눈을 감았다. 김동삼도 1931년 일제에 체포됐다.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망명했던 이상룡도 1932년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데려올 생각을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동에 남은 문중 사람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 만주에 돈과 인력을 끊임없이 수혈해야 했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을 바로잡은 어머니의 훈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이 31세 때 겪은 경술국치는 큰 시련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경술년 8월 나라가 망하자 나는 통곡하며 ‘나라는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큰 치욕이다’ 하고 매일 술을 마셨다. 양반이라고 하는 자들이 일본으로부터 은사금을 받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개돼지’라고 비난했다. (중략) 나는 잇속 하인배와 술꾼, 노름꾼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김창숙이 미쳤다.”고 하면 나는 “맞는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대꾸했다. (중략) 1913년 겨울 어머니는 집에 돌아온 탕아를 붙들고 크게 울면서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는 훌륭한 어른의 종손으로 책임이 중하다. 그리고 늙은 어미가 너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 경술년 이후 술에 취해 무뢰배들과 어울리면서 난봉꾼, 악소배가 되었다. 남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참으로 미친 것 같다. 조상의 사당에 어찌 서겠느냐?”
훈계를 들은 심산은 어머니를 껴안고 통곡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회고하기를 자신 일생의 학문의 깨달음은 이때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유림단의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에 대표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장석영을 포함한 유림계가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운동이었다. 김창숙은 해방이 되자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부부 광복군 출신 김근수金根洙·전월선全月善 애국지사
의성 김씨 문중에서 김근수金根洙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3선 국회의원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 활동을 했던 전 개혁당 대표 김원웅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회장의 아버지이다. 진주 출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가담해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근수는 이준식李俊植이 이끄는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산서와 화북 지구에서 지하공작에 참여하는 등 일제 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중경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던 애국지사 김근수와 전월선全月善은 백범 김구가 맺어준 ‘부부 광복군’으로 널리 알려져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는 1977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마지막 여성 광복군’ 전월선 지사는 2009년 5월에 생을 마감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의성 김씨의 씨족사를 살펴보면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편안했던 시대에는 드높은 학문적 역량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권문세가와 전통 양반층의 대부분이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한 반면, 의성 김씨 가문은 선비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민족의 버팀목으로서 대한민국 독립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고려조의 인물
원종조에 과거에 올라 충선왕 때 찬성사贊成事에 오른 김훤金晅과 그의 아들 김개물金開物이 있으나 ‘임술보壬戌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의 증손 김태권金台權은 좌사윤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거두金居斗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간본重刊本의 발문을 쓸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김거익金居翼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했다.
김광부金光富는 김용비金龍庇의 셋째 아들 김영金英의 손자로 우왕 5년 영남순문사嶺南巡問使 겸兼 합포도원수合浦都元帥로서 침입한 왜구와 싸우다가 가수현嘉樹縣 서정西亭에서 전사, 병조판서兵曹判書·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으로 추증되었다.
찬성공파贊成公派의 파조가 되는 김성단金成丹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김용초金用超는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무예에도 뛰어났다.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정도전鄭道傳 등 15명과 함께 공훈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조선 개국 후 영남병마도절제사嶺南兵馬都節制使를 제수받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김영렬金英烈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박포朴苞의 난 때 신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조의 인물
의성 김씨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며 조선 인종仁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연산군 7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2년 뒤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로 전라도관찰사로 있다가 기묘사화 때 대사헌 조광조의 일파라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관직은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예조禮曹·병조兵曹의 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좌찬성左贊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다.
김안국은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병법·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어린이의 학습서이며 오륜의 윤리를 서술함), 「모재집慕齋集」, 「모재가훈慕齋家訓」 등의 저서와 「이륜행실二倫行實」, 「창진방瘡疹方」 등의 편저서를 남겼다. 조광조와 같이 지치주의至治主義(인간 세상을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 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교 교리)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문하에서 서하河西 김인후金麟厚,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 등이 배출되었다.
모재 김안국의 부조묘不祧廟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 있다. 부조묘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어야 하지만 공훈이 있는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그의 동생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역시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중종 4년 문과에 급제, 호당湖堂*에 뽑혔고 황해도·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병조·형조참판을 지냈다. 기묘사화 때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다가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지냈다. 저서에는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기묘당적己卯黨籍」, 「사재집思齋集」 등이 있다. 사재 김정국 묘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묘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3번지에 있다.
*호당湖堂 - 조선조 세종~숙종 간대에 시행된 인재 양성 제도의 하나다. 글재주와 덕이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초급 관리 중에서 대제학이 엄히 선발하여 장기 휴가를 주어서 공부, 즉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래서 이를 독서당讀書堂 또는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내려서 독서하게 한다)라고도 불렀다.
영남 유림의 거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의성 김씨 가문의 내앞(안동 천전리川前里) 문중 중흥시조는 김진金璡인데, 다섯 아들 중 넷째가 바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1590, 선조 23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황李滉 문하에서 공부하고 호당湖堂에 뽑히기도 했던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사성司成으로 통신부사가 되었는데, 동인이었던 그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보고했던 서인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침략의 위험이 없다고 보고했다. 2년 뒤 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의 책임을 추궁했으나, 같은 동인東人인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화를 면했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일대가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는데,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유성룡 등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喪禮考證」,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학봉집鶴峯集(1627년 사후 문집)」이 있다.
조선의 3대 여류 시인 임벽당林碧堂 의성 김씨
임벽당林碧堂 의성 김씨義城金氏(1492~1549)는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중기의 3대 여류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녀는 부여 중정리에서 아버지 김수천(한성서윤, 병조참관)의 장녀로 태어났다. 임벽당은 김축金軸으로부터 학문을 닦고 18살 되던 해에 비인 도화동(현 남당리) 기계 유씨杞溪俞氏 여주공汝舟公에게 출가했다. 이때 임벽당의 시아버지 서호공西湖公은 사육신 사건과 연루된 집안이라 하여 핍박과 수난을 당하였다. 결혼 9년 만에 기묘사화를 당하여 현량과에 천거된 부군이 벼슬을 버리고 비인 남당리로 낙향하여 고달프게 살았다. 그러나 임벽당은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시詩, 문文, 서書, 수예 등 규방 예술에 힘을 기울였다.
임벽당의 시문은 사후 1683년(숙종 9년)에 서장관 애산艾山 김두명金斗明이 중국에 다녀올 때 명나라 전겸익錢謙益의 열조시집列朝詩集이란 책자를 가져오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열조시집에는 <별증別贈>, <빈녀음貧女吟>, <고객사賈客詞> 등 임벽당의 시 3수가 수록되어 있다.
학봉 김성일 이후 의성 김씨 가문
김우옹金宇顒은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명종 22년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그와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20권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풀려나 부호군副護軍으로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를 건의했고, 그 후 이조·예조·병조참판吏曹·禮曹·兵曹參判,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했다.
김용金涌은 선조 때 과거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했다.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쟁,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이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598년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삭직削職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선산부사善山府使 등 외직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태상사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김지수金地粹는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해 부령富寧으로 귀양을 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예·병조의 낭관郎官을 지냈다. 「조천록朝天錄」은 인조 4년 정사 김상헌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가면서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김성구金聲久는 부제학 김우굉金宇宏의 후손으로 지평持平·정언正言·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후손에서 문과 급제자가 19명 나왔다.
김방걸金邦杰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복제문제를 거론한 ‘기사소己巳疏’를 올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승지承旨·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나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을 탄핵했던 죄로 동복으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리校理 김성택金聖澤의 아들 김낙행金樂行은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귀양 가게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귀양지로 따라가 10여 년간 모신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효자로 이름이 있었다.
김굉金紘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1년 문과에 급제, 전적·지평·단양군수·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명필·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단양군수 때 이속들의 시폐時弊를 논한 만언소萬言疏가 명문으로 꼽히고, 중요한 외교문서를 많이 썼다.
김연동金鉛東은 관찰사 김성구金聲久의 증손으로 정조 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觀察使·승지承旨·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는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되기도 하였다.
의성 김씨의 후손에서 구한말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운 열사·의사로는 다음의 인물을 들 수 있다.
김도화金道和는 을미사변(1895년) 직후 곽종석郭鍾錫·김흥락金興洛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서상설徐相說 등과 연합전선을 펴서 일본군과 싸운 인물이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는데 한일합방 후 일본 총독부에서 사문斯文 진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우대, 식민 통치에 이용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이때 그를 찾아왔던 고교형高橋亨은 집 대문에 ‘합방반대지가合邦反對之家’라는 글씨를 써 붙이고 돌아갔다 한다.
김하락金河洛도 을미사변 때 창의하여 운현雲峴·노루목·이현梨峴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남한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뒤에 영덕盈德 오십천五十川 전투에서 순국했다. 그의 「정토일기征討日記」는 당시 의병 활동의 기록이다.
김동삼金東三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고, 이준李儁·여준呂準 등과는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정臨政 노동국 총관이 되기도 하고, 또 여러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통의부統義府를 조직, 총장이 되었다. 1925년 정의부를 조직, 행
정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일경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김용환金龍煥은 학봉의 13대 종손으로 파락호破落戶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노름꾼으로 철저히 위장하여 독립군 자금의 공금책 역할을 했다. 700마지기 농토를 팔고, 종가를 세 번이나 팔았다. 이런 행적이 뒤늦게 알려져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유림으로 일제 시대 반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애국자요 학자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疏’를 올렸고, 1908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비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전국 유림 대표 137명의 명의로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 이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기 위해 상해로 갔었으며, 그곳에서 임정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다음 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 기관지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서민일보를 발간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손문孫文과 교섭,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하기도 하였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가 1927년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잡혀 본국으로 압송, 징역 1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어 버렸다.
8·15 광복 후 유도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고, 초대 성균관 관장과 성균관대 학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고문을 보냈다가 40일간 옥고를 치렀고 이시영·김성수·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1962년 노환으로 별세한 후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만삭의 임산부도 망명길, 식민지에서 출산하는 것 거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내앞 문중은 또 한 번 자기 혁신을 한다. 계몽주의자들이 대개 개량주의 친일파로 전락했지만 이들은 비타협적 투쟁 노선을 선택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협동학교의 주역이었던 이상룡, 유인식, 김대락이 문중을 이끌고 남만주로 집단 이주를 단행했다. ‘일제에 세금을 낸 술로 제사를 지내고, 가옥세를 낸 집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앞 문중에서는 22가구 50여 명이 망명길에 나섰다. 김대락의 손부와 손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1910년 12월 24일 안동을 출발해서 다음 해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했다. 이들은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세웠으며 군대를 조직했다. 당시 경학사의 사장은 이상룡이었고 이희영이 내무부장, 김동삼이 교육부장이었다.
망명객들은 벼농사를 개척했지만 물이 차서 실패를 거듭했다. 풍토병이나 마적과도 싸워야 했다. 이상룡은 한인 마을을 개척하고, 청년을 끌어모아 독립운동 전진기지를 개척했다. 김동삼은 이들을 기반으로 서로군정서와 같은 군사 조직을 만들어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전투에 내앞 사람 여럿이 참전했다. 1920년 일제가 서북간도에 있는 조선인 마을과 학교를 불태우고 학살할 때 내앞 문중도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삼광학교 교장이며 김동삼의 동생이었던 김동만이 이때 죽었다. 이른바 ‘경신대참변’이다. 1914년 김대락이 망명지에서 향년 70세로 눈을 감았다. 김동삼도 1931년 일제에 체포됐다.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망명했던 이상룡도 1932년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데려올 생각을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동에 남은 문중 사람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 만주에 돈과 인력을 끊임없이 수혈해야 했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을 바로잡은 어머니의 훈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이 31세 때 겪은 경술국치는 큰 시련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경술년 8월 나라가 망하자 나는 통곡하며 ‘나라는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큰 치욕이다’ 하고 매일 술을 마셨다. 양반이라고 하는 자들이 일본으로부터 은사금을 받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개돼지’라고 비난했다. (중략) 나는 잇속 하인배와 술꾼, 노름꾼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김창숙이 미쳤다.”고 하면 나는 “맞는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대꾸했다. (중략) 1913년 겨울 어머니는 집에 돌아온 탕아를 붙들고 크게 울면서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는 훌륭한 어른의 종손으로 책임이 중하다. 그리고 늙은 어미가 너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 경술년 이후 술에 취해 무뢰배들과 어울리면서 난봉꾼, 악소배가 되었다. 남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참으로 미친 것 같다. 조상의 사당에 어찌 서겠느냐?”
훈계를 들은 심산은 어머니를 껴안고 통곡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회고하기를 자신 일생의 학문의 깨달음은 이때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유림단의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에 대표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장석영을 포함한 유림계가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운동이었다. 김창숙은 해방이 되자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부부 광복군 출신 김근수金根洙·전월선全月善 애국지사
의성 김씨 문중에서 김근수金根洙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3선 국회의원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 활동을 했던 전 개혁당 대표 김원웅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회장의 아버지이다. 진주 출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가담해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근수는 이준식李俊植이 이끄는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산서와 화북 지구에서 지하공작에 참여하는 등 일제 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중경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던 애국지사 김근수와 전월선全月善은 백범 김구가 맺어준 ‘부부 광복군’으로 널리 알려져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는 1977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마지막 여성 광복군’ 전월선 지사는 2009년 5월에 생을 마감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의성 김씨의 씨족사를 살펴보면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편안했던 시대에는 드높은 학문적 역량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권문세가와 전통 양반층의 대부분이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한 반면, 의성 김씨 가문은 선비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민족의 버팀목으로서 대한민국 독립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