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孝令 사공司空씨
시조 사공도司空圖
사공司空씨는 중국의 성씨로 진晉나라 가신賈辛이 사공司空이란 벼슬을 받고 벼슬 이름을 성으로 하사받은 것이 시초라 전한다. 우리나라 사공씨는 당나라 희종僖宗 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사공도司空圖이다. 그는 신라 효공왕 1년(897년)에 황소黃巢의 난을 피하여 일가족을 데리고 신라로 귀화하였다. 그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출신으로 문장에 밝아 최치원과도 교우가 깊었다고 한다. 대륙의 병란兵亂이 진정되자 단신으로 귀국,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때 남은 가족들의 후예가 사공씨의 계통을 이어받아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가 불분명해 고려 충숙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의사사判儀寺事를 지낸 사공중상司空仲常을 일세조로 하고, 그가 후에 효령군孝令君에 봉해지면서 관향을 효령으로 삼았다.
관향의 역사
효령孝令은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일대의 옛 지명이다. 신라 때 노동멱현奴同覓縣(일명 가두멱현如豆覓縣)과 모혜현芼兮縣이 설치되었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노동목현은 군위현으로, 모혜현은 효령현孝靈縣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림현缶林縣과 함께 숭선군崇善郡(선산善山)의 관할이 되었다. 군위현軍威縣의 명칭에 대한 일설로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 후백제군을 치기 위해 이 지역을 지날 때 고려군의 위세가 당당함을 칭송하기 위해 촌장에게 군위라는 이름을 지어준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는 군위·효령·부계현(부림현)이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다가 1143년(인종 21년) 일선현一善縣(善山) 소속으로 개편되었고, 1390년(공양왕 2년)에 군위현이 효령현을 병합하면서 감무가 파견되며 독립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군위현으로 정비된 이래 조선시대 동안 명맥이 이어졌다. 군위는 적라赤羅라는 별호로 불리기도 했는데,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위군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의흥군과 의성군의 일부가 군위군으로 폐합되었다. 1979년에는 군위면이 군위읍으로 승격되었다.
주요 인물들고려 의종 때 사공임광司空林光이 별감別監으로 나라에 충성한 행적이 사서에 기록돼 있고 고려 말 사공중상司空仲常은 원元에 들어가 벼슬이 판의시사判儀侍事에 올랐다. 이런 관력이 고려조에서 높이 대접받아 공민왕 9년에 효령군孝令君에 피봉되었으며 효령 사공씨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그의 아들 사공실司空實은 공민왕 2년에 급제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 광흥창사廣興倉使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덕행을 널리 떨쳐 동방명현록에 수록되었다. 사공실의 아들 사공민司空敏은 벼슬이 시중에 올랐으나 창왕 1년에 정변을 만나 낙향하였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는 태종 때 사공제司空濟가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세종 조에는 사공원司空遠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내기도 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로 있던 사공주司空周는 상소하여 불의를 탄핵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그는 호인 ‘경어耕漁’ 두 글자를 방에 써 붙여 놓고 두문불출하며 세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앉지도 않을 만큼 강직한 분이었다. 그래서 사육신에 비길 만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공씨 중에는 효행이 두드러진 분도 많았다고 한다. 사공정司空精은 효도와 덕행이 알려져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학의 양성에 정진했다고 전한다. 현대 인물로는 제33대 재무부 장관과 제 27대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지낸 사공일司空壹 씨가 있다. 주요 세거지는 경북 군위군 효령면 노행동, 성동, 장군동 등지이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통계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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