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姓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15년의 조사에서는 성씨의 개수가 5582개로 크게 늘어났다. 이중 한자로 이루어진 성은 1507개이고, 한자가 없는 성은 4075개나 된다. 본관은 3만6744개로 조사되었다. 이중 밀양 손씨는 인구수가 306,895명이었다. 한편 손씨 전체 인구는 457,303명이었다.
손씨의 유래
시조에 얽힌 이야기
삼국유사에 의하면 옛날 진한辰韓땅에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세 번째 기록에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이 있고 촌장村長은 구례마俱禮馬로 처음 이산伊山(지금의 구미산)에 내려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祖가 되었다고 한다. 즉, 손씨의 원조元祖가 된 것이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는 조선 백성이 동해빈東海濱에 사는데 육촌으로 나뉘어 진한의 육부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육부가 알천閼川에 모여 상의하기를 임금이 없어서 백성이 다 방종하고 무례하니 유덕한 사람을 군주로 선출키로 하고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모시고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였다 했다. 이때가 단기 2277년(서기전 57년)이다. 그리고 동국통감에는 신라 유리왕 9년(단기 2365년, 서기 32년)에 육부명六部名을 고쳐서 대수부大樹部를 모량부牟梁部로 할 때 촌장 구례마에게 성씨姓氏 손씨孫氏를 사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례마의 시호諡號는 충렬군忠烈君이요, 후에 문의왕文義王에 추봉되었다. 신라 개국공신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서기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 남산南山 아래에 ‘입덕묘立德廟’를 세워서 육부촌장六部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8월 17일을 기하여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일세조一世祖 손순孫順구례마의 31세손의 휘는 순順이요 자字는 사구士久이니 신라 모량부牟梁部 사람 태자사인太子舍人 휘 학산鶴山의 아들이다.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의 딸에게 장가들어 취향산醉香山 밑에서 살았다. 손순은 효孝로 명성이 천추에 빛나 신라 흥덕왕 10년(서기 835년)에 월성군月城君으로 책봉되었다. 그의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가 시조가 되어 다시 일세가 된다. 그는 일찍이 부친이 돌아가시고 가세가 빈곤해지자 아내와 같이 품을 팔아서 어머님 운오運烏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그런데 어린 자식이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민망히 여긴 그는 부인에게 이르기를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다.”고 하면서, 자식을 버려서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하려 했다.
이에 백씨부인白氏夫人에게 의논하여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효도의 본분을 다하고자 한다고 하니 부군夫君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아이를 업고 취향산 북쪽 기슭으로 가 땅을 파니 삽 끝에 옥석玉石 소리가 나서 그가 이상히 여겨 주위를 두루 파니 둥근 옥돌로서 석종石鐘이었다. 시험 삼아 두드리니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 처가 말하기를 “아이를 묻으려다 이것을 얻었으니 이것은 아들의 복이라 묻지 맙시다.”고 했다. 그가 옳게 여겨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귀가하여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리니 왕궁까지 종소리가 들리었다. 왕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서쪽에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니 찾아 알아보라 하여 좌우 신하들이 집을 물어 찾아가 말하여 그가 종을 가지고 왕궁王宮으로 갔다. 왕이 내관內官에게 두드려 보라 하고 이르기를 “어떻게 이 석종을 얻게 되었는가?” 하자 그가 사유를 말한즉 왕이 말하기를 “기이한 일이로다 곽거는 아들을 묻으려다 금솥을 얻었다더니 손순은 석종을 얻었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하고 명하여 종은 악부樂府에 소장하고 집 한채와 세급미歲給米 50석을 주게 하고 또 높은 벼슬을 내렸다. 이때가 통일신라 흥덕왕興德王 10년(을묘乙卯, 서기 835년)이다. 그의 묘는 모량촌牟梁村 앞에 있다. 사람들이 이 묘를 효자릉孝子陵이라 한다. 문효공 손순 이후 관향이 셋으로 나뉘었으니 밀양密陽, 평해平海, 경주慶州로 분파되었다.
성씨의 변천과정
중흥조 손긍훈孫兢訓
중흥조中興祖인 손긍훈孫兢訓은 고려 태조 왕건과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정1품)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 밀양 손씨의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긍훈은 밀양 남정촌에서 태어났다. 특히 손긍훈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외적 방어에 큰 공을 세웠으며 신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의 근본인 세속오계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 교육에도 앞장섰다. 긍훈은 고려 태조 때 도총都摠으로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웠다. 후세인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추화산推火山 정사당頂祠堂에 소상塑像을 모셔 부내관주府內官主로 향사를 지내오다 춘복재 현충사顯忠祠로 옮겨 봉안하여 향사하고 현재 추향제秋享祭는 묘소에서 행한다. 그의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밀양에 왜군이 침입하게 되었는데 손 장군과 수천의 신병神兵들이 추화산에 나타나 왜병을 쫓았으며 인조 병자호란 때 이필달李必達이 많은 군사로 쌍령雙嶺에서 분전하고 충주 달천達川에서 싸울 때 손긍훈이 꿈에 나타나 부사 이필달에게 현몽하여 전원 무사히 생환케 하였다고 한다. 손긍훈의 묘는 경남 밀양시 교2동에 있다.
손변孫抃은 손긍훈의 9세손이다. 고려 때 천안부天安府 판관判官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정2품 부총리)에 올랐으며 평장사平章事(정2품)에 오른 손효려孫孝麗가 명성을 날렸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한 손빈은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국방장관)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적비가 세워졌고 서기 1340년(충혜왕 복위 원년)에 일어난 ‘조적의 난’ 때는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이름을 떨쳤다. 이후 금자광록대부의 품계로 집현전 태학사를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랐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거쳐 사도司徒(고려시대에 3공의 하나로 정1품)에 이르러 밀성군密城君(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한편 현감縣監(종6품 수령)을 지낸 손중견의 증손 손책孫策은 고려 말의 절신으로 수주목사樹州牧使(‘수주’는 경기도 부천 지역의 옛 지명, ‘목사’는 고려 및 조선 시대의 정3품 수령) 때 조선 개국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다.
조선실록을 지켜낸 손홍록孫弘祿예안禮安(안동의 옛 지명) 현감을 지냈으며 문한文翰(문장과 문필에 능함)으로 유명한 손영제孫英濟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학명을 떨쳤고 도산서원을 건립할 때 사재를 털어 조력하였다. 창원부사 등을 역임한 성리학자 손기양孫起陽, 금성대군 및 장인인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한 손서륜孫敍倫,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손덕심孫德沈 등이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조선 시대 상월대사霜月大師 역시 손가의 인물이다. 상월대사는 목사공 손책의 후예이다. 상월대사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도총섭都摠攝이며 국일도國一都 대선사大禪師이다. 대사는 임종 때 “물은 흘러 원류에서 바다로 가고,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서 떠나지 않는다. 기꺼이 대공大空의 섭리에 순응하리”라는 법어로 유명하며 수는 81세였다. 한편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승군僧軍의 궐기를 부르짖고 일어선 서산대사 휴정에게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의 승직을 제수한 이후 보편화된 직명이었다.
현감을 지낸 손민孫敏의 아들 손비장孫比長은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시무4조時務四條’를 임금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 등과 같이 동국통감을 지어 임금에게 올린 후 공조참의工曹參議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장례원은 조선 시대에 공사노비 문서의 관리와 노비소송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예문관의 정3품)에 이르렀다.
손홍록孫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보존케 한 인물이다. 그는 전주 경기전 - 정읍 내장산 - 정읍 - 태인 - 익산 - 용안 - 임천 - 부여 - 정산 - 온양 - 아산 - 수원 - 남양 - 인천 - 부평 - 강화 - 해주 - 안주 - 묘향산으로 옮겨가면서 왕조의 실록을 지켜 냈다. 임란 당시 춘추관春秋館, 충주사고忠州史庫, 성주사고星州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왕조실록은 모두 불타고 오로지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살아남았다. 임란 당시 왜군이 전라도로 들어오기 위해 금산錦山에서 조선의 관군, 의병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전주성에서는 태조의 어진御眞과 사고의 실록을 어디로 피난시킬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정읍의 내장산으로 이를 옮기기로 하고, 어진을 모시는 경기전慶基殿의 참봉 오희길이 정읍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이때 그를 돕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이 지방의 유생 손홍록孫弘祿과 안의安義였다. 안의와 손홍록은 노비와 머슴 30여 명을 동원하여 전주로 달려가서 어진과 전주사고에 있던 1천여 권의 책을 50여 개의 궤짝에 넣어 내장산으로 옮겼다. 당시 이들이 옮긴 전주사고의 책은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삼국사,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고려사, 동국사기, 동국사략, 동국통감 등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중요한 사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2년 안의와 손홍록이 전주에서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길 때 그들의 나이는 각각 64세와 56세였다. 내장산에서 1년여를 머문 어진과 실록은 1593년 7월 왜군의 공격으로 전라도가 다시 위험해지자 해주에 있던 선조의 명에 따라 북상 길에 오르게 된다. 정부에서 파견된 유탁과 경기전 참봉 여정구와 이도길, 그리고 안의와 손홍록이 이 일을 맡았다. 정읍을 떠난 일행은 도보로 부평까지 올라가서 배를 타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사람들을 동원한 것은 안의와 손홍록이었다. 이들은 1593년 8월 선조로부터 별제別提라는 종6품 벼슬을 하사받았다. 밀양 손씨는 조선시대에 문과에 31명, 무과에 38명, 사마시에 72명, 의과에 1명, 음양과에 1명, 율과에 1명 등 14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밀양 손씨 근현대 인물
걸레의 삶을 산 손정도孫貞道
근대 인물로는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孫秉熙는 밀양 손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가 되어 일제강점기의 어지러운 정국에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역시 독립투사의 삶을 살았다. 해석은 1895년 두 살위인 박신일과 결혼하고 22세 때 향시鄕試를 보러 평양으로 가던 중 우연히묵게 된 목사 집에서 기독교 교리와 서구 문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과거를 포기한 채 귀향했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마저 부숴 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올라왔다.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된 문요한(Dr. John Z. Moore) 목사의 목사관에서 일하면서 숭실중학과 전문학교를 다닌다. 1910년 목사가 되어 평양감리교선교사에서 시무하다 만주 파견 선교사로 선정되었다. 1912년 안동, 길림, 간도 지방을 순회하며 선교활동에 몰두하던 중 가쓰라 일본수상 암살 모의로 체포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1921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교통총장을 지내며 만주 지린에서 농업공사를 설립했다. 손정도는 힘없이 떠도는 동포들을 도와주었는데, 자신의 친구인 김형직이 사망하자 어려움에 처하게 된 아들 김일성(북한 전 주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을 자기 집에 함께 살도록 했다. 손정도는 자녀들에게 ‘걸레의 삶’을 강조했다고 한다.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되므로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했다. 손정도는 고문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1931년 2월 19일 지린의 동양병원에서 별세했다.
손화중孫華仲은 대교공 손홍적孫弘積의 5세손으로 성질이 충직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어려서부터 효우의 정신이 남달랐다고 한다. 아버지 손효열과 평강 채씨의 장남으로 20세의 약관으로 동학에 입도하여 정읍의 대접주가 되어 뛰어난 포교의 수완을 보였다. 1892년 삼례의 교조 신원운동에도 많은 신도들을 동원하였고 장내리 집회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갑오 동학혁명 때 수천 명의 교도를 동원하여 공격에 앞장섰으며 동학혁명을 지도할 때에 특히 족제族弟 낙회樂會와 여옥汝玉 등 종중宗中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흥덕으로 돌아와 은신하다 이봉우의 밀고로 붙잡혀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전 가족이 몰살될 뻔했으나 다행히 혈육이 남아 향화를 잇고 있다. 사손嗣孫으로 홍철, 홍렬이 있고 낙회 공은 태인으로 피하여 화를 면하고 사회개혁에 앞장서서 일생을 마쳤다.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孫元一손원일孫元一은 대한민국의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었다. 손원일은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나 유문중학을 다니다가 원광중학으로 옮겨 졸업했는데 김일성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손원일은 1930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후 중국 해군의 원양항해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40년 동화양행이라는 회사의 상하이 지점장으로 나갔다가 광복되던 날 귀국하여 정긍모, 민병중, 김일병 등과 해군 창설에 앞장섰다. 손원일은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관훈동에서 해방병단을 창립, 대한민국 해군의 요람을 일군다. “해군은 신사紳士여야 한다”고 믿은 그는 한자 “十一을 세로로 쓰면 ‘士’가 된다”는 점에 착안, 창설일을 ‘士’ 자가 계속되는 11월 11일로 정했다. 이는 육군과 공군에 앞서 가장 먼저 창군한 기록이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40세 때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는데 6.25 전쟁 중에는 해병대로 하여금 경남 통영 탈환작전을 성사시켜 ‘귀신 잡는 해병’이란 별명을 얻게 하기도 했다. 1953년 6월 해군중장으로 예편한 뒤 그해 8월 제5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국방장관이 되어서는 미국으로부터 7억 달러의 원조를 받아내 10개의 예비사단을 창설하는 등 국군 현대화의 초석을 다졌다. 행정면에 있어서도 국군묘지 창설, 군목제도의 활성화, 전시연합대학과 국방대학원 창설, 국내외 위탁교육제도의 신설 등 인재양성에도 공헌하였다. 1956년에는 서독대사로 임명되어 3년간 외교 일선에서 국위 선양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의 각종 국제대회에 대표로 참석하는 등 1인 10역의 눈부신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 홍은혜씨는 해군 초창기에 해군 간부 부인들을 중심으로 군함 구입을 위한 범국민적 성금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을 작곡하기도 해 ‘해군의 어머니’로 불려오고 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孫基禎은 사부공 손탁의 후예로 1912년 8월 29일 평북 의주군 광성면에서 태어났다. 망국의 한을 안고 참여했던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시상대에서 슬프게 고개를 숙여 세계인들에게 식민지 백성의 아픔을 알렸다. 이 사건은 나중에 동아일보에서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확대된다. 자기의 인생에 대해 “25세 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 나는 덤으로 살고 있다.”고 한 손기정 옹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섰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나머지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던 그의 모습은 우리 현대사의 영욕과 오버랩되어 온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밖에 밀양 손씨 현대 인물로는 손양기(종친회장), 손석주(고문), 손인옥(공정거래위원회부위원장), 손병두(한국방송공사이사장, 전경련부회장), 손길승(SK 텔레콤 명예회장), 손종현(남선기공회장, 한국공작기게산업협회회장), 손광섭(청주박물관장), 손인석(한국청년회의소중앙회장), 손세일(전 국회의원), 손홍식(헌혈왕), 손용섭(충북도민대상수상), 손태근(한국씨족총람현집위원), 손학규(경기지사), 손주항(전 국회의원), 손흥민(축구 선수), 손연재(리듬체조 선수), 손정의(일본 소프트뱅크사 회장) 등이 있다.
밀양은 밀양시 일원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추화군推火郡인데, 757년(경덕왕 11)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6)에는 밀주密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다시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경주)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현縣으로 승격하였다. 1390년에 밀양부로 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는 밀양도호부가 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경남 밀양군이 되었다. 1989년 시로 승격하여 독립하였다. 1995년에는 밀양군이 밀양시에 통합되었다.
구례마俱禮馬
아주 먼 옛날부터 2천 년 전까지 손씨孫氏 씨족장氏族長을 칭하던 고유명칭이다. 역사문헌 상에 기록된 손씨 씨족의 흔적을 살펴보면, 옛 고조선 영토인 탁수涿水(지금의 북경 일대)에서 살았다고 한다. 기원전 238년(또는 224년) 고조선이 멸망하자 다른 씨족과 함께 중원中原을 떠나 한반도로 대이동을 시작했으며, 한漢 문제文帝 3년(기원전 177년) 춘3월春三月 당시 진한辰韓 땅이었던 경주慶州 이산伊山(지금의 구미산)에 손씨들이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통계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