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고성) [STB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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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김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성씨가 이씨입니다. 전체 인구에서 14.7%를 차지하고 있고 약 73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씨는 여러 계통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이 중에서 경주 이씨와 전주 이씨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 외에 중국 계통과 만주, 월남 계통이 있으며 다른 성씨에서 분적한 이씨도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민족과 인류 역사의 근원을 바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덕을 쌓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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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의 중시조


고성 이씨는 고성의 옛 지명을 따서 철성 이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015년 실시한 통계조사에서는 고성 이씨와 철성 이씨가 따로 표기되어 있지만 같은 성씨입니다. 그래서 2015년 기준으로 고성 이씨는 약 10만 5천 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또한 고성 이씨는 총 10대 파로 분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요. 이 중 7대 파는 행촌 이암의 손자이며 세종대왕의 스승이었던 용헌공 이원의 7형제를 각각 중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고성 이씨는 관향이 경남 고성이지만 고성뿐만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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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을 세거지 혹은 집성촌이라고 합니다. 집성촌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거 등장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젊은 청년들이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면서 집성촌은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근래까지 명맥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성 이씨 집성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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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집성촌은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왜곡리, 사천시 사남면 사촌리, 진주시 일반성면 가선리를 비롯해서 경상북도와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남도에 있었고 제주도에는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북쪽으로는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송남리에 있었습니다.

뿌리공원이 있는 대전의 대덕구 비래골에도 고성 이씨 집성촌이 있는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피해 고성 이씨 일가인 이계종이 처음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지금은 47가구가 모여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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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의 시조


대전 뿌리공원에 있는 고성 이씨 성씨 조형물을 보면 고성 이씨의 시조와 역대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고성 이씨 시조는 고려 덕종 때 문과 급제 후 밀직부사를 거쳐 호부상서에 이르시고 철령군의 봉호를 받으신 휘 ‘황璜’이시다. 중흥조인 7세 ‘존비尊庇’는 판밀직사사 철성부원군 문희 시호와 8세 ‘우瑀’는 문하시중 철성부원군 문헌 시호를 받았다. 아우 ‘정精’은 각진국사이다. 9세 ‘암嵒’은 송설체 명필로 칭송되었고, 단군세기를 저술하여 한민족의 근원을 밝혔다. 수문하시중, 호종공신으로 철성부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문정이며 호는 행촌杏村이다.
- 뿌리공원 <고성 이씨 조형물> 中


 

성씨 조형물에 의하면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철령군鐵嶺君 이황李璜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철령군 이황과 퇴계 이황은 동명이인입니다. 그럼 철령군 이황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경남 고성군 금봉재는 고성 이씨의 시조와 중시조의 제향을 모시는 재실齋室로서 600여 년 전부터 여기에서 터를 잡고 고성 이씨가 번창하게 된 곳입니다. 또한 이곳에서 고성 이씨의 시조인 철령군 이황의 제향을 모시고 있습니다. 시제는 매년 10월 첫 정正이 들어가는 날 지내고 있습니다. 전국에 계시는 모든 종친들이 다 여기에 와서 제를 지냅니다. - 고성 이씨 고성 지역 회장 이종석

철령군 이황은 고려 중기에서 후기에 활약하신 분인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관직에 들어가셔서 정3품까지, 오늘날에 비유하면 장관급까지 이르신 분인데 문무를 겸했습니다. 거란군을 퇴치한 경력도 있고, 철령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철령이라는 곳이 고성군의 옛 지명이고, 철령이 철성으로 바뀌고 지금의 고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철령에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고 해서 철령군이라는 봉호를 받으신 후 우리의 본관이 되었습니다. - 행촌학술문화진흥원 이기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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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를 저술한 행촌 이암李喦


고성 이씨의 성씨 조형물의 내용을 보면 고성 이씨의 9세손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하여 한민족의 근원을 밝혔다고 나옵니다. 단군세기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권의 역사서 중 하나이며, 단군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환단고기를 공부해 보면 고성 이씨는 우리 역사와 관련해서 특별한 이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성 이씨와 『환단고기』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던 문희공 이존비는 단군세기를 저술한 행촌 이암의 조부입니다. 왕세자가 글을 배우는 사연에서 이존비가 아뢴 내용을 보면 그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환단桓檀, 조선, 북부여, 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를 유지하였습니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실행하였으나, 지금은 사대의 주장이 국시로 정해져 있어 군신 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진실로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하겠사옵니까?
- 왕세자에게 아뢴 이존비의 글


 

이와 같은 이존비의 역사의식이 손자인 이암에게 그대로 전해져 단군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단군세기가 탄생하게 됩니다. 행촌 이암 선생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말에 활약하신 분으로 어려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관료로 시작을 하셨는데 공명정대하게 인사를 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로 말하면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까지 역임하신 정치적 인물이시며, 고려 시대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알려진 명필가입니다. 또한 농상집요農桑輯要라는 책을 원나라에서 가져와 반포해서 농사와 누에치기 등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행촌 선생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단군세기』를 집필한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 행촌학술문화진흥원 이기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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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9세손인 행촌 이암은 고려 말 충렬왕에서 공민왕 때의 문신으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 육군참모총장,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을 역임한 당시 국정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에 따라 강화도 마리산 보제사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는데 부모님 생각이 날 때마다 초대 단군왕검께서 쌓으신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고 합니다. 이때 이미 이암은 외래풍이 뒤덮고 있던 고려를 그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려는 큰 뜻을 품은 시를 짓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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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피폐한 가운데 여섯 임금을 모시며 격동의 삶을 산 이암은 67세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가서 언제부터 집필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남은 여생을 『단군세기』 완성에 모두 바쳐 그해 10월 3일 개천절에 『단군세기』를 완성하고 이듬해 1364년 5월 5일 68세의 일기로 운명하게 됩니다.
 
『단군세기』는 초대 단군에서부터 47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철학 사상 등이 내포되어 있는 책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고려 말이라는 시대 상황은 원나라의 간섭을 심하게 받았던 시대이고 또 앞일이 어떻게 될지 나라를 지탱할 수 있을지 몹시 걱정되는 시대였습니다. 나라가 흔들릴수록 정신적인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는데요 그 정신적인 힘이 바로 고대의 우리 역사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점을 굉장히 중시해서 『단군세기』라는 책을 정리하셨다고 봅니다. 『단군세기』를 읽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해서 홍익인간이 되는 그런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다시 그 등불을 밝히는 방법과 내용들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습니다. - 행촌학술문화진흥원 이기동 이사장


 

태백일사를 저술한 일십당 이맥李陌


단군세기는 당시 동북아의 종주였던 옛 조선의 영화로운 역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저술한 역작입니다. 행촌 이암의 현손 중에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이 있는데 이맥은 성품이 강직하여 장녹수가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50세에 충청도 괴산에 유배됩니다. 그리고 66세 때인 1520년에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이 되어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마음껏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환단고기』의 80% 분량을 차지하는 「태백일사太白逸史」를 편찬하게 됩니다. 태백일사는 우리의 국통맥 전체를 기록하고 있는 책으로 한민족사를 집대성한 역사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소장하고 있던 「북부여기」를 계연수에게 전하여 『환단고기』 출간에 기여한 평안북도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 또한 고성 이씨입니다. 이렇게 전해진 세 권의 역사서와 삼성기 상, 하를 한 권으로 묶어 탄생한 『환단고기』는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담은 역사의 기록이었지만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수많은 역경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전수하여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들 또한 고성 이씨입니다. 『환단고기』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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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연수를 만난 해학 이기李沂


구한말의 인물인 해학海鶴 이기李沂는 전라도 만경 출신이며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또한 석정 이정직, 매천 황현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로 불렸습니다. 이맥의 후손인 이기는 제자인 계연수桂延壽에게 집안에 전해 오던 「태백일사」를 전해 주어 『환단고기』가 발간되게 하고, 세세히 감수하기도 합니다. 또한 단군 성조의 얼을 새기고 옛 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에 매진하였지만 끝내 나라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음식을 끊고 순국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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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를 발행한 한암당 이유립李裕岦


그리고 계연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환단고기』를 굳게 지켜 오늘의 한국 사회에 널리 대중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岦입니다.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집의 넷째 아들이었던 이유립은 고성 이씨 35세손입니다. 이유립은 『환단고기』 편찬자인 계연수와 친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찍 역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이 되자 『환단고기』 한 권을 가슴에 품고 월남하여 1963년에는 대전 은행동에 정착하면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77세가 되던 1983년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환단고기』 100부를 발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고성 이씨는 한민족과 인류 역사의 근원을 바로 세우는 『환단고기』 탄생과 전수에 지대한 공덕을 세웠습니다. 고성 이씨 집안에서 『환단고기』의 80%를 기록했으며, 『환단고기』를 대중에 공개한 것도 고성 이씨 가문입니다. 사대주의와 식민주의 늪에 빠져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뻔한 우리 역사를 다시 회생시키는 데 불멸의 공덕을 세운 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원의 후손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경북 안동의 고성 이씨 종손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표 인물입니다. 석주 이상룡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이회영 형제, 김동상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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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의 선조는 노자老子


고성 이씨의 시조인 철령군 이황의 선조는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고성 이씨 시조 철령군 이황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춘추시대 사상가로 잘 알려진 노자老子에 이르게 됩니다. 『사기정의』 「현묘내편」에는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81년 동안 임신하였는데 자두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왼쪽 겨드랑이를 갈라서 노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에 의하면 노자가 성으로 오얏 이李 자를 쓰게 된 것은 오얏나무, 즉 자두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노자의 후손 중에 이반李槃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반은 한나라 문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습니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할 때 이반의 후손이 도호원수가 되어 이곳에 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 살게 되었고, 이반의 24세손이 고성 이씨의 시조 철령군 이황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고성 이씨의 선조는 노자老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맥이 쓴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는 노자의 혈통을 잘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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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쓴 사기열전史記列傳에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이 있습니다. 여기에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인데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귀 이耳를 썼고, 주나라 수장실의 사관을 지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초나라 고현은 지금의 지명으로는 하남성 주구시 녹읍현이며, 지금의 중국 사람들도 녹읍현이 노자의 고향이고 이李씨 성의 발원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녹읍현에는 태청궁, 노군대, 노자기념탑 등의 노자와 관련된 유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노자는 성을 이李씨로 썼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노자는 그 뒤에 함곡관을 지나 서쪽으로 가서 사람들을 교화하였다고 하는데 자신의 혈통이 중국 민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李씨 성으로 바꾸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李라는 글자를 파자하면 나무 목木 자와 아들 자子로 나뉘어지는데요, 나무 목木은 오행에서 동방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李라는 글자 속에는 ‘나는 동방의 아들이다’라는 신원을 밝히기 위해 이李라는 성을 썼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 대전대학교 한의과대 원전학 윤창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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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에 줄기와 가지로 뻗어 나간 생명은 가을이 되면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런 자연의 이치처럼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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