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인동 장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18만 4863가구에 59만 1315명으로 안동 권씨에 이어 13위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장씨
장씨의 연원
우리나라의 장씨는 크게 세 종족으로 나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태사공 장정필을 시조로 하는 안동 장씨와 장경을 시조로 하는 흥성 장씨 일족과 장금용, 장계를 시조로 하는 인동 장씨 일족이다. 안동 장씨의 시조 장정필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신라 말에 중국에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들어온 장씨로는 덕수德水 장씨(시조 장순용張舜龍), 절강浙江 장씨(시조 장해빈張海濱)가 있다. 장순용은 회회계(아랍계)의 사람으로 고려 고종 때에 귀화하였고 장해빈은 중국 항주 조강현 출신으로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에 장수로 와서 군위軍威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그 외 대부분의 장씨는 인동 장씨와 안동 장씨에서 분적하였다. 장張씨의 본관은 문헌상 270여 본이 전하나 현존하는 것은 20여 본이다. 그런데 최근에 장씨의 연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등장했다. 서울대 사학과 송기호 교수가 「발해국지渤海國志」와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를 비롯하여 각종 사료와 외교문서에 남아있는 대진국(발해) 지배층의 성씨를 조사, 분석해 뽑은 적이 있다. 그 결과 조사대상 380명 중 왕족인 대大씨가 117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고高씨가 63명, 이李씨가 21명, 장張씨가 20명이고, 기타 성씨가 134명이었다. 이중 확실히 밝혀진 유력한 귀족 성씨는 고高씨, 이李씨, 장張씨, 양楊씨, 두竇씨, 오烏씨였다(KBS역사스페설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2005년 11월 25일 방영). 대진국은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 만큼 장씨가 적어도 고구려 시대부터 나라의 대성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장정필 이전에도 장씨가 존재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백제의 장무張茂, 대진국의 장문휴張文休 장군, 신라의 장웅張雄, 장보고張保皐, 고려의 장일張一 등이다. 이제 장씨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약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인동의 장씨들
인동 장씨는 범 장씨계의 65%를 차지한다. 수로나 명성으로나 단연 장씨의 대표격이다. 인동에서 결성, 울진 등 20여 본이 분적해 본관을 따로 쓰고 있으나 크게는 역시 인장仁張이다. 분적한 집안에서도 일부는 그대로 인동을 본관으로 쓰기도 한다. 현재 인동을 본으로 하는 장씨는 현재 6개 파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시조를 모시고 있어 뿌리가 같은 집안이라 단정할 수 없다. 이중 대표적인 문중은 인동 장씨 장금용파와 인동 장씨 장계파이다. 보통 인동 장씨라 하면 이 2파를 통칭하는 것이다.
1)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 계 시조는 고려 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다. 시조 장금용이 인동에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8대를 내려온다. 한때는 이웃인 칠곡漆谷·선산善山 등지에 이르기까지 2000여 호를 헤아릴 정도로 번창한 마을을 형성하였다. 1977년 구미공단의 개발로 구미시가 발족, 인동동으로 편입되면서 급속히 해체되는 변모를 겪게 되었다.
2)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 계 고려 충렬왕 때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한다. 장계는 고려 태사공 장정필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는데, 옥산玉山과 연복延福은 인동의 다른 이름이다.
3)문충공文忠公 장계임張繼任 계 고려 충렬왕 때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하고 후에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정승, 춘추관사春秋舘事의 증직이 내린 문충공 장계임을 시조로 한다. 이는 문충공의 8세손 문숙공文肅公 장순손張順孫이 중종 17년(1522) 병조판서 때 그 아버지 증좌찬성贈左贊成 장중지張重智와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 고씨의 묘비문에 첫 선조로 기록한 것에서 유래한다.
4)장수명張壽命 계 장정필의 장손 장금선張錦善의 후손 장수명張壽命이 시조이다. 본관을 안동과 인동으로 쓰는데 함경도의 함흥과 영흥, 북청지방北靑地方에 사는 장씨張氏는 옥산장씨로 족보를 해오다가 뒤에 인동으로 개관改貫하였다.
5)흥성장씨興城張氏 장연좌張延佐 계 흥성장씨 시조인 시랑侍郞 장유張儒의 둘째아들 호부상서戶部尙書 장연좌張延佐가 시조다. 장연좌가 옥산군에 봉封 해졌다하여 옥산 장씨라 하다가 관적貫籍을 인동으로 하였다고 한다. 흥성 장씨와 족보를 같이하고 있다.
6)예빈경禮賓卿 장용서張龍瑞 계 고려말 예빈경 장용서(張龍瑞 혹은 用瑞)계의 인동 장씨는 과거 황해도 장연張淵과 주로 북한의 평안도에 많이 살았다. 8.15 해방 후 월남하였으며 본관을 옥산玉山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인동仁同으로 많이 쓴다.
인동仁同의 역사
인동仁同은 본래 신라 때 사동화현斯同火縣이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서기 739)에 수동壽同으로 개칭하고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 주군현州郡縣 개편시 인동현仁同縣으로 개칭하고 8대 현종 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에 경산부에서 분리되어 인동에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 전국의 감무를 혁파할 때 인동현仁同縣으로 하여 현감縣監을 두었다. 선조 34년(1601) 찰리사察理使 곽재우 장군이 인동 천생산天生山의 성곽을 수축하여 국방의 요새로 부각됨에 따라 선조 37년(1604) 7월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고종 32년(1895) 5월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인동도호부를 인동군仁同郡으로 개칭하면서 읍내면邑內面과 북면北面, 동면東面, 장곡면長谷面, 문량면文良面, 석적면石赤面, 북삼면北三面, 약목면若木面, 기산면岐山面 등 9개의 면을 관할하게 했다. 1914년 한일병탄 후 3월 1일 인동군을 폐지하여 칠곡군에 편입켰고, 그해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합쳐서 인동면仁同面으로 개편하였다. 인동면은 1977년 3월 2일 경상북도 구미지역출장소의 행정관할로 되었다가 1978년 2월 15일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 종전 인동면의 인의동仁義洞과 황상동黃桑洞, 구평동九坪洞, 신동新洞의 4개 동을 합쳐서 행정동인 인동동仁同洞으로 하였다. 따라서 인동면은 신라때부터 칠곡군에 병합될 때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관아의 소재지였다. 1914년부터 1977년 구미시에 편입 직전까지는 63년 동안 인동면사무소를 현재의 인의동에 두었다. 현재 인의동에는 인동 장씨 종가가 자리잡고 있는데 시조 장금용이 터 잡은 뒤 1,000년 이상 종손들이 그대로 보전하고, 중수, 보수를 하여 현재까지도 종손들과 종친들이 물려받아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인동의 이칭異稱으로 쓰이는 옥산玉山은 인동동에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사동화’, ‘수동’과 함께 ‘옥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옥산은 현의 동쪽 50보步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산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옥산은 천생산에서 뻗어 나와 주산主山을 이룬다.”라는 기록이 있어 옥산이 인동도호부의 주산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동 장씨 문중에서는 지금도 본관을 옥산과 인동을 혼용해서 쓰고 있다.
성씨의 변천 과정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 계
장금용 장금용을 시조로 삼는 문헌적 근거는 조선 선조 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기술한 「여헌록旅軒錄」이다. 여헌이 “인동 장씨의 시조는 대광공 장금용(所及知最先之祖大匡公)”이라 하고 “대광공의 부와 조부가 누구인지, 그 이상의 조상이 있었는지 세계가 전해오지 않아 알 수 없다(其上所未及知考又幾許代乎)”라고 하였다. 장금용은 고려 때 개국공신 삼중대광三重大匡(정일품의 품계)에 올라 신호위神號衛(국방을 맡은 대위중의 하나) 상장군上將軍(정삼품의 무관직으로 각 군영의 수직)을 역임했다. 전체 25개 파가 있는데 인동 향내 지명을 파명派名으로 하는 5개 파와 타 지역 명을 파명으로 20개 파로 나뉜다. 조선시대에는 정승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55명을 배출하였다. 14세손 장보張俌의 자손들까지는 인동·성주 등지에 살다가 18세 이후로는 예산·진주·하동·원주·상주·무안·은진·공주·서천 등지로 흩어졌다.
주요 인물 장금용의 아들 장선張善은 고려 문종 26년 반란을 토벌한 공으로 금오위金吾衛(수도 개경을 순찰, 점검하는 경찰 임무를 맡음) 상장군에 올라 인동을 세거지로 삼았다. 장금용의 증손이며, 봉정대부奉正大夫 내사령內史令을 거쳐 직사관直史館을 지낸 장국신張國伸이 있고, 통의대부通議大夫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에 오른 장위張偉가 가세를 일으켰다. 또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린 절신節臣으로 유명한 장안세張安世와 장중양張中陽 부자가 있다. 장안세는 직제학을 역임한 장계와 함께 활동한 인물로 덕령부윤을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절개로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의 한 명이다. 장중양도 친구였던 태조 이성계가 한성좌윤漢城左尹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뿌리치고 ‘내가 죽은 뒤 고려조의 벼슬을 묘비에 써달라’고 유언했다.
조선조에서는 임진왜란 때 군위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장사진張士珍, 성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장봉한張鳳翰,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의병으로 24세의 나이로 순절한 장홍한張鴻翰 등이 있다. 문무를 겸비하여 이괄의 난을 평정한 팔도도원수 장만張晩,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우고 형조판서를 역임한 장붕익張鵬翼 등 인동 장씨는 문무에서 골고루 인물들을 배출했다. 학문에서 인장을 대표하는 인물은 조선조 중엽의 대大성리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있다. 장현광은 장안세의 후손으로 선조 28년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으나 곧 물러난 뒤, 이조판서, 대사헌 등 20여 차례 벼슬 제수도 거부하고 인동 향리에서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였다. 그는 퇴계학파의 거두로 정구鄭逑의 문인이자 조카 사위로 인조 때는 왕의 부름을 받아 정치에 대한 조언을 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와 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다음 해 삼전도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동해안 입암立巖에 들어가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허목, 김응조, 김지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공文康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으로 ‘여헌록’이 있고 ‘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경위설經緯說’, ‘우주요괄록宇宙要括錄’ 등의 저서가 전한다. 율곡, 퇴계와는 또 다른 독자적 성리학설로 최근 국내학계는 물론 일본, 중국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泉谷書院,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선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장현광의 양자 청천당廳天堂 장청일張廳一은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는 간관諫官의 전형으로 전해진다. 효종 때는 대사간大司諫 김경록, 집의執義 송준길 등과 함께 권신 김자점의 탐욕, 방자함을 탄핵했다. 그는 청렴강직함 때문에 출세가 막히기도 했으나 후에 우승지, 부제학, 대사간까지 올랐으며, 사후엔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목공文穆公이란 시호가 내렸다.
장옥정張玉貞(희빈禧嬪 장씨張氏)은 역관譯官이었던 조부 장응인, 아버지 장형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반이었던 장옥정의 조부 장응인은 중국과의 무역거래로 역관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보고 장경인과 함께 역관이 되었다. 이후 인동 장씨는 역과에 7명이나 수석합격을 낸 역관 명문 집안이 되었다. 장옥정은 조대비의 조카인 조사석의 소개로 궁녀가 되어 숙종의 총애를 입었다. 그리고 역관이었던 인동 장씨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왕후까지 올랐으나, 인현왕후를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다.
직제학 장계계
시조 장계 장계는 고려 충열왕 31년에 국학진사國學進士 권지도평의록사權知都評議錄事 동진사同進士에 등과하여 진현전進賢殿 직제학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문관대제학에 이르고 옥산군에 봉해졌다. 상계는 고려의 개국공신 태사공 장정필에서 비롯하였는데 그를 상조上祖 또는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장정필의 후손 중에 장상겸이 있고 그 아들에 14세 기機, 익榏, 식拭, 식栻, 사楒, 계桂의 다섯 명이 있었다. 다섯째 계를 시조로 한다. 이와 같이 논증한다면 대제학 장계는 태사 장정필의 후손이 된다. 장계가 인동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아 후손들은 7세에 이르기까지 세거하면서 명문의 틀을 잡았다. 5개의 주요 파가 있다.
주요 인물 장계의 손자로 광주부사를 지낸 장용서張龍瑞가 있고, 장계의 6세손으로 홍산현감을 지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고 옥산군에 추증된 장안량張安良이 있다. 또 그는 5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현달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장안식張安式은 훈련원 판관을 지냈고, 장용서의 증손인 장자원張自遠은 검교檢校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왕세자 교육을 담당)을 지냈다. 그 후손들이 평안도 용천, 정주 등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장안량의 5형제 중 장남인 장선손張善孫은 의정부 첨서와 녹사를 역임했으며, 차남 장경손張敬孫은 사재감 주부를 지냈고, 또 인동의 다른 별호인 연복군에 봉해진 장말손張末孫은 호가 송설헌松雪軒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활약했다.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직접 문무文武의 선비와 장군 28인을 선발하여 토벌군을 조직했는데, 이때 여기에 포함돼 토벌에 참여했다. 반란이 종식되자 그는 변란을 제압한 공로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에 책봉됐다.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의 현손 장언상이 영주에 정착하였다.
장순손張順孫은 군수였던 장중지의 아들로 정언과 판관을 지내고, 춘추관의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연산군 때 직간하였다가 화를 입고 원방에 부처되었으나, 중종반정이후 복권되어 병조판서에 올랐다. 김안로 등과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축출하려 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장계가 인동현의 남쪽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은 이후 후손들은 7세에 이르기까지 세거하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조선 성종 이후로 임지에 따라 서울 창동倉洞을 비롯한 충청북도 제천堤川^단양丹陽과 경상북도의 영주榮州^예천醴泉^문경聞慶^의성義城^자인慈仁 등 전국 각지로 산거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5개 파로 분파되어 경상북도 영주, 예천, 문경과 충청북도 단양 지역에 살아왔다.
인동 장씨 근·현대 인물
장태수張泰秀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하였으며, 철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정언, 지평을 역임하였다. 고종 때 병조참의, 동부승지, 경연참찬관을 지냈다. 하지만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직하였다. 일본 헌병대에 아들 3형제가 붙잡혀가자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죽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1894년 진사가 되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때는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했다. 그해 사예소의 직원으로 ‘대한예전’ 편찬에 참여했고 내부주사를 사임한 뒤에는 만민공동회의 총무위원으로 이승만 등과 함께 정부의 실정과 5적을 규탄하기도 했다. 위암이 언론에 투신한 것은 비교적 늦은 36세가 되던 1899년으로 격일간지 ‘시사총보’가 시발점이었다. 이어 황성신문사의 주필로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다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에 취임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6년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구국운동을 벌이다 단체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대한협회로 개편하였으나 압력이 심하여 1908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을 떠났다. 상해, 남경 등지를 방랑하다가 귀국한 1909년 최초의 지방지인 진주 경남일보의 주필로 취임했으나, 다음해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 이로 말미암아 경남일보가 폐간되는 불운을 겪었다. 위암은 언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니, 그의 저서 ‘조선유교연원’은 한국유교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술로서, ‘일사유사’는 서민층 출신으로 특기할 행적을 남긴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근대 시민의식을 고취한 저서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망국의 설움을 폭음으로 달래다가 1921년 음력 10월 2일 55세를 일기로 마산에서 일생을 마쳤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승만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장택상張澤相과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장면張勉이 유명하다. 창랑滄浪 장택상은 1893년에 경상북도 칠곡에서 출생하였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청구회靑丘會 회장으로 있다가 8·15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하였으며, 제2대, 3대, 4대, 5대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엔 국무총리에 기용되었으며, 1959년엔 재일교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네바에 파견되기도 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재야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병사했다.
운석雲石 장면은 1899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고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해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6·25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기여하였다. 1951년에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야당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장면과 윤보선 순수내각제였던 제2공화국에서 신파를 대표하는 장면은 총리를,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은 대통령을 했다. 1955년엔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창당였으며, 1959년엔 조병옥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다. 4·19혁명 후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집권 후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게 되자,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장도영張都暎은 1923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신의주고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신의주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광복 후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월남하여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장면 총리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재직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에 추대되었으나, 곧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하고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백상栢想 장기영張基榮은 한국은행 부총재, 조선일보·한국일보 사장, 경제기획원장관, 국회의원, 대한체육회 회장, IOC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 장병상張柄祥의 가문이 호남의 명문가이자 천재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장병상씨는 4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자신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백범 김구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또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아버지의 명에 따라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중 둘째가 장충식 후지필름 대표이고, 셋째가 장재식(전 국회의원, 산자부장관)이며, 넷째가 뉴욕대 교수와 한전 사장을 지낸 장영식씨이다. 그 손자들 중에선 학계의 거목이 많이 나왔는데, 장하진 전 여성부 장관을 비롯하여 장하성(고대 교수),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하석(옥스포드대 교수), 장하상(전 보잉사 이사)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인동 장씨에서는 정관계 및 유명 인사들이 많다. 정관계 인사로는 장경순(전 국회부의장), 장기욱, 장성만, 장충식, 장동식(이상 전 국회의원), 장덕진(전 국회의원, 농수산부 장관) 등이 있으며, 학계와 언론계에는 장충식(단국대 총장), 장왕록(서울대 교수), 장강재(한국일보 사장), 장두성(언론인), 장명수(전 전북대 총장) 등이 있다. 또 배우 장동건, 가수 장우혁, 역도선수 장미란 등도 인동 장씨로 알려져 있다. 주요 집성촌은 경북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경북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 경북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 경북 구미시 인동동, 경북 칠곡군 석적읍 중리, 성곡리, 경남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노연리, 의창구 대산면 갈전리, 전남 담양군 담양읍 오계리,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평북 박천군 청룡면 응봉동, 대화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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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