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백호智伯虎는 진한 6촌의 하나인 자산 진지촌의 촌장입니다. 그는 신라의 박혁거세를 첫 번째 왕으로 추대한 인물이며,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도시조가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정씨 중에서 대표적인 성씨인 경주 정씨와 동래 정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씨의 유래와 본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6촌이 있었는데 이 6촌의 촌장들이 함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기 32년, 유리 이사금 9년에 6촌이 6부로 개칭되면서 여섯 성씨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때 자산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는 정鄭씨 성을 사성賜姓받게 됩니다.
정씨
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성씨인데, 중국에서 귀화한 ‘서산 정씨*’와 ‘낭야 정씨*’를 제외하면 모두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입니다. 정씨는 130여 개의 본관이 있으나 경주, 동래, 진주, 연일, 하동, 초계 정씨 등을 비롯해서 30여 본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 만 명 이상인 정씨는 14개 본입니다.
*정씨 : 215만여 명(2015년 기준)
*서산 정씨 : 송나라 멸망 후 고려로 건너와 서산에 정착
*낭야 정씨 : 명나라 때 산동성 낭야에서 조선으로 들어와 정착
※정씨 주요 본관
경주, 동래, 연일(영일⦁오천), 진주(진양), 하동, 초계, 광주, 나주, 봉화, 서산, 온양, 청주, 팔계, 해주
1. 경주 정씨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최씨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성씨입니다. 이 정씨에서 가장 오래된 본관은 경주 정씨이며, 자산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경주 정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경주 정씨의 계통과 집성촌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35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정씨에서 16.3%를 차지합니다. 또한 경주 정씨는 크게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개 파로 나눠지는데 다시 그 아래에 여러 파로 분파되어 있습니다.
※경주 정씨 16.3%, 동래 정씨 22%, 연일(영일, 오천) 정씨 18.3%, 진주(진양) 정씨 15.1%, 하동 정씨 8.7%, 초계 정씨 4.8%, 기타 14.8%
집성촌으로는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와 순창군 동계면 서호리,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남곡리를 비롯해서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경주 정씨의 뿌리공원 조형물
“경주 정씨는 우리나라 정씨의 대종으로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신라를 구성한 진한국 사로 6촌 중의 하나인 자산 진지촌 촌장인 지백호 공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서기전 117년 경주 화산花山에 강림하여 부족 국가이던 사로의 여섯 고을 중 자산 진지촌을 다스렸으며 그 뒤 서기전 69년 3월 초하루 다른 다섯 촌장과 함께 ... 나정蘿井 곁에서 난생아卵生兒인 혁거세를 얻어 ... 서기전 57년 그를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기 32년 봄에 그의 현손玄孫 대代 동충東沖에 와서 사로 육촌의 촌장들과 사성賜姓을 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낙랑후樂浪侯로 봉훈과 아울러 정씨鄭氏로 사성을 받았다.” - 대전 뿌리공원 경주 정씨 조형물 中
정씨의 시조, 지백호
우리나라 정씨의 도시조이면서 경주 정씨의 시조는 지백호입니다. 이 지백호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①백운대 “백운대는 행정구역으로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위치하고 있고 백운대라는 것은 자연부락 단위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는 신라건국 공존사직 감문왕(지백호)께서 모셔져 있고, 옆에는 시림군 정년 장군과 중시조 정진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백운대는 유네스코에 등재가 된 곳으로 국립공원 소속입니다. 신라 개국공신 여섯 명 중 오직 정씨만 묘가 남아 있습니다. 백운대에서의 묘제는 10월 초하룻날 정씨 후손들이 모여 거행하고 있습니다.” - 육부전 정가대표 부회장 정문탁
②시조 지백호
“경주 정씨의 시조 신라건국 공존사직 감문왕께서는 진한 6부의 촌장으로서 다섯 어른과 함께 모여 신라의 초대 임금인 박혁거세를 왕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경주 정씨의 본관은 중시조 정진후 이후부터 사용하였습니다. 지백호 할아버지의 후손은 전국에 약 200만 명 정도 됩니다.”
- 육부전 정가대표 부회장 정문탁
경주 정씨의 본관은 원래 계림, 월성 등으로 쓰이다가 지백호의 41세손인 문정공文正公 정진후鄭珍厚 대에 이르러 본관을 경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정진후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경주 정씨의 인물 ①정지운鄭之雲
조선 중기 인물로 성리학의 대가 ‘정지운’이 있습니다. 경기도 고양 출신인 그는 마음이 곧아 사람을 사귀는 데도 신중했으며, 벼슬에 천거되어도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일찍이 독창적인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는데 퇴계 이황의 감수를 받아 완성한 이 책은 천명과 인성의 관계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해설을 붙인 것입니다. 천명도설은 간행되자마자 당대 선비들에게 최고의 필독서가 되었고 이후 이것은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여는 계기가 됩니다.
경주 정씨의 인물 ②정발鄭撥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의 제1군이 부산진성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첫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부산진성을 지킨 장수는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 첨사였습니다. 그는 1553년 경기도 연천군에서 출생하여 1577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몇 달 전에 부산진 첨절제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왜군 1만 8천여 명의 공격에 부산진성의 병력은 겨우 600명뿐이었고, 성안의 군민이 힘을 합쳐 분전했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화살이 떨어지고 더는 버틸 수 없자 부하 장수들이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장군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또다시 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공은 탄환에 맞아 절명하고 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성은 함락되었지만, 성안의 군민이 전멸할 때까지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왜군은 적잖이 놀랐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휴전 중 강화교섭을 위해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신이 왜장 평조신으로부터 정발의 무용을 극찬하는 회고담을 듣고 더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검은 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민을 지휘하는 장군의 용맹한 모습을 보고 왜병들은 그를 ‘흑의장군’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의 첫 전투에서 순절한 정발 첨사는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그의 충절을 기려 부산진성의 남문 자리에 세운 정공단鄭公壇과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충렬사에서 제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