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씨에서 가장 큰집은 경주 정씨입니다. 하지만 정씨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본관은 동래 정씨입니다. 동래 정씨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동래 정씨의 계통과 집성촌
지금의 부산 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동래 정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47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며, 전체 정씨에서 22%를 차지해 정씨에서 가장 큰 성씨가 됩니다.
또한 계파를 보면 크게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 첨사공파詹事公派, 호장공파戶長公派 등 세 개 파로 나눠지며, 다시 그 아래에 여러 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집성촌을 살펴보면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와 박곡리를 비롯해 600년을 내려온 동래 정씨 집성촌인 서울 중랑구 망우동 양원리 등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동래 정씨의 시조, 정회문鄭繪文
동래 정씨는 도시조 지백호智白伯虎의 후예이나 워낙 연대가 오래되고 계대를 상세히 알 수 없어 동래에 세거하며 신라의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회문 이후 또한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초에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동래 정씨는 오랫동안 동래에 세거하며 살아온 지방의 호족입니다. 그런데 2세 정문도鄭文道 이후에 정문도의 장남 정목鄭穆과 정목의 네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하게 되면서 가세가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화지산에 묻힌 정문도의 묘는 8대 명당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 명당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래 정씨의 명당 이야기
정문도의 아들 정목은 부친이 죽자 화지산에 장사 지낸다. 그런데 다음 날 동생과 같이 화지산에 가 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형제는 다시 목관을 묻고 범인을 잡기 위해 몰래 숨어 감시를 하는데, 밤이 깊어 삼경에 이르자 난데없이 도깨비들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 하며 도깨비들은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형제는 ‘금관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날이 새자 형제는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고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묘소를 감시하는데, 이번에도 지난밤의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또 무덤을 파헤치더니 달빛에 비치는 보릿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는 “금관이야. 이제 됐어. 어서 가자.”라고 하면서 행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백발노인의 말대로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동래 정씨는 조선조에 와서 더욱 번창하게 됩니다. 17명의 정승을 배출하면서 전주 이씨, 안동 김씨와 더불어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동래 정씨 종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동래 정씨의 인물 ①정서鄭敍
정서鄭敍는 고려 때의 인물입니다. 정서는 정문도의 증손자로 내시낭중이란 벼슬을 지냈으며 호는 과정瓜亭입니다. 정서의 아내가 고려 인종 왕비의 동생이기 때문에 인종과는 동서 사이가 됩니다.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다음 왕인 의종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됩니다. 유배지에서 탄생한 유명한 노래가 바로 ‘정과정곡鄭瓜亭曲’입니다. 정과정곡은 한글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가가 분명한 유일한 노래라고 하며, 고려는 물론 조선에까지 계속 궁중음악으로 불렸습니다.
동래에 유배를 온 그는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서 오이 농사를 지으며 ‘과정’이란 정자를 짓고 약속한 왕의 부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정서와 그의 문학을 기려 연제구 연산동에는 ‘과정로’라는 길과 과정초등학교가 있으며 수영구 망미동에는 정과정곡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동래 정씨의 인물 ②정여립鄭汝立
조선조에서 동래 정씨가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조 때 일어난 기축옥사의 중심에 정여립鄭汝立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무예나 활쏘기에 뛰어나고 학문에도 두루 능통했다고 합니다. 원래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는 서인의 인사였으나, 1584년 수찬이 된 뒤 동인 편으로 돌아섭니다. 이에 정철, 송익필을 비롯한 서인의 미움과 선조의 비판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됩니다.
그는 진안 죽도에서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그 세력은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점점 커졌습니다. 대동계는 군사적 능력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
損竹島에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이때 남언경은 관군만으로 왜구를 물리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동계와 연합작전으로 왜구를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정여립과 대동계는 역모로 몰리게 됩니다. 3년 동안 무려 천여 명이 죽게 되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조작됐다는 설이 있어 지금도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립니다.
*손죽도損竹島 : 지금의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정여립은 당시 왕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 하는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단재 신채호는 그를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동래 정씨의 인물 ③정인보鄭寅普
일제강점기에 무너진 ‘민족의 얼’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국학 진흥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 위당 정인보鄭寅普입니다.
1893년 서울에서 출생한 정인보는 17세 때 평생 스승으로 모신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으로부터 양명학을 배워 학문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1910년 망국 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연희전문⋅이화여전 등에서 한국사와 국문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키는 한편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사관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35년부터는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동아일보>에 연재했으며, 1945년 마침내 광복이 되자 일제하의 식민정책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국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국학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광복절 노래를 비롯해 4대 국경일 노래를 모두 작사한 인물이기도 하며,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그해 함경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씨 중에서 뿌리가 되는 경주 정씨와 큰 본관인 동래 정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