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씨 (남양) [STB영상]

한국주요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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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씨총연맹본부 0 2,731
우리나라 성姓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남양 홍씨는 인구수 약 41만명으로 집계됐다. 그중 당홍계가 38만명(379708명, 22위) 토홍계가 3만명으로 추산된다. 그 외 홍씨의 본관은 문헌에 111본까지 나와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 중에서 남양南陽, 풍산豊山, 부계缶溪, 홍주洪州 등 4개가 저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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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홍씨


홍씨의 기원
홍씨가 처음 생긴 곳은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홍씨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세 계통의 홍씨가 있다. 그 첫째는 공공씨를 연원으로 하는 홍씨이다. 중국 감숙성 서북부에 있는 돈황敦煌 지역에 살고 있는 공공씨共工氏(고대 치수의 관리)의 후손이 원수의 추격을 피해 공共에다 ‘수水자를 붙여 홍洪이라는 성씨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는 개성改姓을 한 경우인데 굉宏씨가 홍씨로 개성한 경우와 홍弘씨가 홍洪씨로 개성改姓한 경우가 있다. 셋째로 뿌리를 알 수 없는 육계당六桂堂 홍씨가 있다.
 
시조 홍천하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639년) 고구려의 영류왕이 덕예 문학의 학사學士를 보내달라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이에 당태종은 홍학사를 수장으로 한 8학사(홍洪, 은殷, 목睦, 길吉, 위魏, 방房, 기奇, 봉奉)를 파견하였다. 이중 홍학사가 남양 홍씨의 선시조先始祖 되는 홍천하洪天河이다. 그의 휘諱는 천하, 자는 명보明甫로 대대로 중국 강남 휘주徽州 사람이었다. 요동을 거쳐 고구려에 처음 정착한 곳이 당성군의 은수포銀樹浦(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전곡리)로 이곳에서부터 당나라의 문물과 유학을 전수하였다. 원래 당성은 당나라와의 교통의 요지이며 삼국시대 말엽에는 서로가 탐내서 싸움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다. 드디어 644년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때문에 당나라에서 파견된 학사들은 고구려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당나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란으로 육로가 차단되어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부득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지리산 덕산촌德山村(현재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 머물러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신라의 27대 선덕여왕은 예로써 대우하고 8학사들이 덕산촌에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돌보아 주도록 명하고 홍학사를 덕산촌주德山村主로 봉하였다. 또한 8학사를 신라의 신하가 아닌 당나라의 신하라 하여 ‘당신唐臣’이라 하였고 홍학사의 학덕을 높여 도호道號를 당동唐東선생이라 하였다. 태종무열왕 역시 지극히 봉양하여 처음 도착한 곳에 성을 쌓아 당성唐城이라 하고 그를 당성백唐城伯으로 봉하였다. 신무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전습하고 태자태부太子太傅(태자의 스승)를 봉하였고 효소왕은 유지를 이어받아 당성후唐城侯로 봉하였다. 신라의 5대 왕이 다 스승으로 섬겼으니 공의 덕망과 예능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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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홍과 당홍으로 나누는 홍씨
남양 홍씨는 동성동본이나 조상을 달리하는 두 가지 계보가 있는 성씨이다.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 그것이다. 당홍은 고구려 때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이고, 토홍은 고려 고종조에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이다. 당홍, 토홍이라는 속칭도 바로 이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에 들어가 있다. 두 집안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 하나는 당홍은 글자 그대로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씨이며, 토홍은 우리나라 토착의 홍씨라는 것이다. 둘째는 당홍은 남양의 옛 이름인 당성홍씨의 약어로서 또다른 남양 홍씨가 생겨나자, 이를 구분하기 위해 당홍에 대칭되는 용어로 토홍이란 별칭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세째는 당홍의 시조로 일컫는 홍학사의 후예 가운데 일파가 난을 피해 신분을 감추며 별계의 토호을 내세웠다는 설(당홍 측 주장) 등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입증할 문헌이나 증거는 없다. 두 집안은 서로 계보를 따로 가리되 남이 아닌 종씨로 사이좋게 지내오고 있으며, 조상은 다르지만 동성동본이라 하여 서로 결혼도 하지 않는다. 남양 홍씨는 고려 때는 최고의 명문 갑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329명(당홍 206명, 토홍 12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 이씨(884명), 안동 권씨(359명), 파평 윤씨(336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것이다. 그중 당홍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8명, 문형文衡 2명을 비롯해 왕비 1명(헌종의 계비), 청백리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 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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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의 변천
남양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이다. 고구려 대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 하였다가 고려 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조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 1914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 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이때 일부 면이 은덕 쌍수 마도 송산 서신 비봉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 수원군의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고, 1949년 수원군을 수원시로 승격시킬 때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되었다.
 

성씨의 변천과정


〈당홍계〉

중시조 홍은열 

시조 홍은열은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홍천하의 11세손으로 출생하였다. 홍은열의 초명初名은 유儒, 자는 자술子術, 후에 몽량夢良이다. 호號는 복룡伏龍으로 당시 사람들은 ‘복룡선생’이라 불렀다 한다. 태조는 고려 창업에 크게 공헌한 그에게 은열殷悅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는 그 공덕이 '은殷나라의 명 재상인 부열傅說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삼한이 서로 쟁패를 겨루는 후삼국의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라 말의 석학 최치원과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스님 등 많은 문사文士로부터 수학하면서 수신과 제가에 힘을 다한다. 그러다 최치원이 신라가 내리는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산사로 은거하면서 당시 궁예 수하로 있던 왕건에게 보낸 격려 편지에서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곡령(개성)은 푸른 솔이다”(鷄林黃葉 鵠嶺靑松) 즉, “신라는 망하고 개성의 새 나라는 흥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전해 듣고,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하여 철원 태봉국으로 가서, 궁예의 신하로 입문했다. 그리고 나중에 궁예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왕건을 세울 때 함께 참여하여 고려 개국에 진력을 다하게 된다. 그 후 고려가 936년 후삼국, 삼한을 통일한 뒤인 서기 940년에 태조 왕건은 삼한통합에 공헌한 공신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신흥사神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지어, 동쪽과 서쪽 벽에 고려 개국 삼한공신을 그려 넣고 공신호功臣號를 책록하였다. 이때 태조 왕건은 은열에게 18자에 걸친 가장 길고도 화려한 공신호를 내려준다. 그것은 “고려 광익 효절 헌양 정난 홍제 분용 양채 보예 경제 공신”(高麗匡翼効節獻襄定難弘濟奮庸亮采保乂經濟功臣)이다. 벼슬이 정일품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자리에 올랐다.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이다. 의성 홍씨의 시조 홍유(초명은 홍술弘述) 장군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홍은열의 묘는 황해북도 토산군 서천면 홍묘리 취적봉 아래 있으며 가묘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2리 산 25번지 노곡재에 조성되어 있다. 후손들이 1960년에 충북 청원군 미산면 수산리에 남양사南陽祠를 건립하여 시조 홍은열과 6세손 충평공忠平公 홍관洪瓘, 11세손인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 광정공 홍규洪規 등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9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례를 지내고 있다.

당홍의 파분류
당홍은 그의 손자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파 예사공파禮史公派, 6대손 때 1파 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대 아래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로 나뉜다. 그중 후손이 가장 많은 파가 남양군파南陽君派(파조 홍주洪澍), 문정공파文正公派(파조 홍언박洪彦博),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파조 홍언수洪彦修), 익산군파益山君派(파조 홍운수洪云遂), 예사공파禮史公派(파조 홍복洪復), 중랑공파中郞公派(파조 홍후洪厚) 등이다.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익산군파(15%)다.
 
〈토홍계〉

시조 홍선행 

또 다른 남양 홍씨(토홍계)의 시조는 홍선행洪先幸이다. 그는 당성(남양의 옛 지명)에서 제법 세력이 있었던 선비 집안의 후손인데,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이 남양 홍씨 토홍계를 이루고 있다.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남양 홍씨 당홍계의 시조인 홍은열의 후손이라는 주장(당홍계)도 있으나, 홍선행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토홍계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토홍의 파분류
시조 홍선행의 9대부터 12대 사이에 문희공파文僖公派, 정효공파貞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등 5개 파가 갈라졌다.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123명을 배출하고, 상신 2명, 대제학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을 배출하였다. 이는 현재 토홍의 인구 3만여 명을 가정할 때 어떤 가문보다 많은 숫자이다.
 

주요 인물들


〈당홍계〉

고려 조의 인물 

고려조의 당홍 인물로는 개국공신 홍은열 외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충절을 지켜 순사한 명필 홍관洪瓘, 충렬왕 때 세 번이나 수상직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충숙왕과 충선왕의 장인으로 남양부원군에 책봉된 된 홍규洪圭, 공민왕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있다. 홍자번은 고려・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전함건조 책임을 맡았었고 원의 간섭과 간신배들의 이간으로 벌어진 충렬・충선왕 부자의 불화가 고려의 국기를 위태롭게 만든 위기에서 끝까지 부자를 화합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애썼던 충신이다. 홍언박도 고려 말 공민왕을 도와 원의 속박을 물리치고 자주성을 회복하는 개혁정치에 오른팔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처남으로 고려 조정에서 실력자로 군림하여 횡포를 일삼던 기철寄轍 일파 숙청에 수훈을 세워 1등공신이 되기도 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는 모두 서울 개경開京을 버리고 피난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만이 서울 사수를 주장했으며 서경西京이 함락돼 끝내 서울을 떠날 때는 왕을 따르며 전시에 궁중 경비를 줄이도록 권유하는 등 충언을 아끼지 않아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를 했다. 2년 뒤 김용金鏞이 난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에서 왕을 죽이려 할 때 몸을 피하라는 아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난군 앞에 나가 불충을 꾸짖다 살해당해 충신의 한 모범을 보였다. 정승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홍규洪奎는 처음 이름이 홍문계洪文系로 부친 홍진洪縉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냈다. 홍규는 성품이 담박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뜻이 커서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원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송송례와 함께 임유무를 처단하여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다. 이 공으로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으나 국사가 나날이 글러가고 동료들도 아첨질이나 일삼자 그는 그들과 함께 조정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겨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버렸다. 왕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올려 주었으나 거듭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당시 나이는 마흔이 못 되었다. 충렬왕 때 다시 발탁되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른 홍규는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양가의 규수들을 뽑아 원나라에 보내려 할 때 자기 딸을 보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은 일이 드러나 한때 가산이 몰수되고 귀양가는 풍파를 겪기도 했다. 홍규는 일족 홍자번 등의 청에 의해 가산이 반환되고 풀려났으나 딸은 원의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시집갔다. 그의 딸 하나는 나중에 충숙왕의 비妃가 됐다.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다. 또 한 딸은 충선왕의 후비가 돼 그는 두 임금의 장인이 되었다. 고려조와의 이같이 깊은 인연으로 당홍의 일부에선 조선조 들어 한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당홍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공신인 홍길민洪吉旼(호조판서)과 아들 홍여방洪汝方(이조판서)이 유명하다. 특히 세조의 반정에 공을 세운 홍윤성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 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거쳐 예종 때 영의정에 올랐으며 홍달손洪達孫은 좌의정, 홍순손洪順孫은 판서判書를 역임, 당홍 영화의 기반을 닦았다. 성종, 광해군 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홍흥洪興은 ‘당대 제일의 풍채’로 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성종은 그를 일부러 명에 사신으로 보내 우리나라의 인물 자랑을 했다고 한다. 뛰어난 풍채만큼 글씨도 훌륭했다. 그의 형 홍응洪應은 또 성종 때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다. 이들은 익산군益山君파다. 조선조 당홍 인물의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에 조선남아의 기개를 알리고 나중 그 인연으로 임진왜란에 국난극복의 공신이 된 홍순언洪純彦(예사공파)이 있다.

홍희남洪喜男은 당홍이 낳은 조선조의 명외교가다. 임란 이후 대일對日 교섭에서 조선측의 주역으로 일본에 여섯 차례나 사신으로 왕래, 국교회복을 매듭지었으며, 명나라에도 두 차례나 사신으로 파견됐다. 1649년 인조가 죽었을 때는 일본의 조문사절을 부산에서 맞아 일본사신 왕래의 새로운 규례를 정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효종 10년(1659) 일본에 사신으로 간 길에 서양을 통해 들어온 유황硫黃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 와 우리나라 화기 발전에 공헌했다.

조선 중기의 당홍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영의정 대제학에 오른 홍서봉洪瑞鳳과 그의 아버지인 천민天民, 할아버지 춘경春卿은 ‘3대 호당湖堂’의 명예를 누린다. 또 천민의 동생인 성민聖民의 후예는 그로부터 6대 7명 대과大科의 영예를 쌓아, 춘경의 아버지 계정係貞부터 따지면 9대 대과의 5백년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 중에는 영의정이 둘(홍명하, 홍치중), 우의정이 1명(홍중보)으로 당홍 영화의 절정을 이룬다. 6대 이후에도 한말 홍순목洪淳穆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조선조 중반 이후 당홍의 영화는 계속되었다. 당홍 영화를 꽃피운 홍서봉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어릴 적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당시 정승이던 홍섬洪暹(토홍) 집 연못에서 놀다가 막 피는 연꽃을 모두 꺾어 버렸다. 노한 홍 정승이 볼기를 치려 하자 다른 아이들은 다 도망쳤으나 서봉만은 가지 않았다. 홍섬이 기이하게 여겨, “네가 만일 시를 짓는다면 매를 때리지 않고 용서해 주겠다”고 했더니 서봉이 “좋습니다”고 선뜻 응답했다. 홍섬이 추秋, 유遊, 우牛의 세 운자를 부르자 서봉은 막힘없이 시구를 이루었다.
 
상공지각냉여추 동자휴붕월하유相公池閣冷如秋 童子携朋月下遊···정승댁 연못은 차기가 가을 같아 소년이 친구와 더불어 달밤에 놀았네.
승평대업지하사 단상연화불문우昇平大業知何事 但想蓮花不問牛···태평세월에 무슨 일이 문제이리, 어찌하여 연꽃만 묻고 소는 아니 물으시는고


 

홍섬은 서봉을 불러 자리에 앉히고 어깨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훗날 반드시 내 자리에 앉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서봉은 벼슬길에서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국무총리)에 올랐다. 병자호란의 국난을 당해서는 최명길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 여러 차례 청나라 진영을 드나들며 강화교섭을 벌였다. 문장과 시에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 성민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형인 승지 천민에게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글을 배우다 말고 갑자기 슬피 울었다. 천민이 까닭을 물으니, “내가 배운 지 몇 달에 한 번도 종아리를 맞지 않았는데 이는 나의 아버지 없음을 불쌍히 여긴 때문이라 슬퍼한다”고 했다. 홍문洪門의 9대 대과 영예는 스스로 채찍질하는 이같은 면학의 정신이 전승돼서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당홍
조선 후기의 대표적 당홍의 인물은 혁명아 홍경래洪景來(예사공파)다. 그는 일찍이 어려서 서당에서 훈장에게 글을 배우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잡혀 죽은 형가邢可를 두고 시를 지으라는 말에, ‘추풍역수장사권秋風易水壯士拳 백일함양천자두白日咸陽天子頭’라고 지어냈다. 훈장이 ‘추풍역수장사권이요, 백일함양천자두라’하고 뜻없이 흥얼거리자 소년 경래는 “선생님 그렇게 읽는 게 아닙니다”하고 즉각 이의를 달았다. 그는 “추풍역수장사권秋風易水壯士拳으로 백일함양천자두白日咸陽天子頭를”하며 ‘으로’와 ‘를’이라는 토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어 방바닥을 내리쳤다. 약한 제나라를 삼키려 기회만 노리는 폭군 진시황을 죽이겠다고 차가운 가을 역수易水 강물을 건너던 그 형가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에 중국천자中國天子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는 이 소년의 기백에 시골훈장은 그만 혼비백산, “얘야, 이제부터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고 도망쳤다는 얘기다. 남 하는 대로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예상대로 낙방한 그는 세도정치와 당쟁과 지역차별로 속속들이 병든 조선을 바로잡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 과거를 단념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박천博川의 청룡사靑龍寺에서 명문의 서자庶子로 역시 사회개혁의 의지를 품고 배회하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의기가 투합, 거사의 모의가 시작된다.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을 본거지로 각지의 장사, 기인, 술사 등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부자들도 포섭, 자금을 대게 했다. 1811년(순조 11년)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혼란해지자, 12월에 2천 병력을 일으켜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일컫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가산嘉山 박천博川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주宣州 태산泰山 철산鐵山 용천龍川 등 평북 일대를 휩쓸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관군과 안주安州에서 싸워 패주, 그의 웅지는 꺾이고 만다. 정주성에 웅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성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린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그때 나이 서른 둘. 불꽃 같은 혁명아의 일생이었다.

조선시대의 토홍
비록 수에서는 당홍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으면서도 토홍은 당홍에 지지 않는 저력이 있었다. 본고장인 남양과 서울, 경북 예천醴泉 영주榮州 봉화奉化, 충남 아산牙山 당진唐津 등에 주로 살았다. 토홍의 영화 중의 절정은 중종 때 영의정에 오른 문희공文僖公 언필彦弼과 그의 아들 섬暹의 대다. 섬은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명상名相 청백리淸白吏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수상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여산礪山 송宋씨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딸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수상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많은 여성’이었다.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한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는 것. 송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 한다. 그녀가 처녀시절 친정 아버지 송질은 극성스런 부인의 성격에 골치를 앓던 나머지 딸들도 어머니를 닮으면 큰일이다 싶어 세 딸을 불러다 놓고 한마당 연극을 했다고 한다. 딸들 앞에 약을 한 사발씩 내놓고 너희들이 어머니를 본받아 극성을 부리면 다음에 시집을 가더라도 송씨 가문에 누가 미칠 터이니 그럴 양이면 여기 이것이 독약이니 아예 마시고 죽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위로 두 언니는 절대로 어머니 같은 극성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반면 유독 셋째 송부인만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기 본마음대로 살지 못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냐”고 선뜻 약사발을 들어 들이켰다는 것이다. 그 약은 그러나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었다. 딸들의 기질을 시험하고 길을 들이려던 송질은 이 셋째 딸의 기개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다. 유감없이 한 세상을 살 그런 기질을 타고났던 듯싶다. 그녀는 평생 세 번 평양平壤을 갔다. 처녀 때 평안감사 아버지를 따라, 결혼한 뒤 평안감사 남편을 따라, 세 번째는 늙어서 평안감사 아들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천하제일 강산 평양의 경치를 구경한 것은 늙어서 아들을 따라 가서였다. 처녀 때와 젊은 부인이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집 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가 되어 세 번째 가서야 가마를 멈추게 하고 “이제는 평양 구경을 해도 욕되지 않을 것이다”며 산천경개를 구경했다. 평안감사 관사 별당에 그녀가 처녀 때 와서 심었던 복숭아와 앵두나무는 그때 고목이 되어 있었다. 송부인은 나무가 이렇게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늙었겠느냐고 인생무상을 탄식했는데 이 얘기를 전해들은 중종은 이 당대 복덕귀福德貴 부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특별과거를 베풀고 글제로 ‘삼지유경탄앵도수로三至柳京歎櫻桃樹老’(세 번 평양에 가서 앵두나무의 늙음을 탄식하다)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남성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존경과 대우를 받은 드문 한편의 가화佳話가 아닐 수 없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장희공 홍숙洪淑이 대사헌과 형조,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형조판서로 재직할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 데 관여하였다. 그의 손자 홍려는 중종의 사위가 되었다. 홍숙의 현손인 홍익한洪翼漢은 김상헌 등과 함께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의 1인이었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살해되었다. 그의 부인인 허씨와 아들 홍수원, 며느리 이씨도 피난길에 함께 죽었다. 그가 순절한 후 도승지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명해졌으며, 광주의 헌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에 제향되었다.

토홍에서 이색적인 인물로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정효공파)이 있다. 그는 목사牧使였던 홍력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류득공 등과 함께 북학파의 일원으로 천문학과 경제에 일가를 이루었다. 영조 때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삼촌 홍억을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문물을 배워왔다. 그는 음양오행설 대신 기화설氣化說을 주장했으며,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지역주민 천거에 의한 공거제貢擧制를 주장했으며, 천문학 연구를 위해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남양 홍씨 근현대 인물


당홍계
한말 대원군의 심복이자 수구 강경파의 거두였던 영의정 홍정목洪渟穆은 그 아들이 홍영식洪英植이다. 영식이 개화파의 선봉으로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처형되자 자결하는 비운을 맞았다. 영식의 형 만식萬植은 의정부議政府 찬정贊政으로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울분을 못 이겨 음독 자결했다.

반면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건의하여 개화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자 관동유림을 대표하던 홍재학洪在鶴은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참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홍종우洪鐘宇는 수구파로 프랑스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김옥균에게 접근한 뒤 암살하였다. 이후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 활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구한말 국난시대 당홍계에서 많은 의병을 배출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洪範圖이다. 홍범도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1907년에 차도선, 태양욱 등과 평안북도에서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압록강을 넘나들며 삼수, 혜산, 풍산, 만포진, 봉오동 등지에서 승리를 이끌며 일제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후 김좌진 등과 합세하여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 등과 함께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고려혁명군사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과 대립을 꺼린 소련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 해제되었다. 이를 ‘흑하사변’이라고 한다. 그는 이후에도 연해주에 농장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옮겨간 뒤 1943년에 병사했다.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는 그의 흉상이 있으며, 건국공로훈장 복장(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이밖에 홍병기洪秉箕와 홍기조洪基兆는 천도교 대표로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였으며, 3·1운동 후 홍병기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홍기조는 국내에서 민족정신 고취활동을 전개하였다.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익성洪益成은 기독교 장로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안동과 만주 일원에서 임정 연락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 외 홍식洪植은 독립군사령부 제3영장으로 국내에 들어와 일경과 교전 중 전사하였으며, 홍학순洪學淳은 식산은행 의주지점을 습격하고, 만주와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홍원식洪元植은 3·1운동 때 고향인 화성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는데, 제암리 학살사건 때 현장에서 살해당하였다. 홍승노洪承魯는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 감찰위원과 김구의 한독당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당홍계에서는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지사를 배출하였다.

광복 후에는 중앙일보 회장과 법무, 내무장관을 역임한 홍진기와 주미대사와 중앙일보 회장을 지내는 홍석현 부자가 있다. 홍진기 일가는 삼성 이병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노신영, 동아일보 김병관 일가 등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현대사를 주름잡고 있다. 그럼에도 홍진기는 일제하에서 판사를 지내고,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 내무장관을 역임하며 조봉암사건, 4·19시위대 발포사건 등과 연루되어 있어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그 외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 문공부장관을 지낸 홍종철, 지식경제부장관을 역임한 홍석우,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지낸 홍경모, 홍두표, 국회의원으로는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고, 경남지사에 재직하고 있는 홍준표를 비롯하여 홍창섭, 홍종욱, 홍재형, 홍정욱, 홍문종, 홍영표, 홍일표, 홍문표, 홍희덕 등이 있으며,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을 역임한 홍진표가 있다. 학계에서는 홍기창(고려대교수), 홍순옥(동국대교수), 홍문화(서울대 약대교수), 홍윤숙(시인)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이건희 삼성회장의 부인이자 라움미술관장인 홍라희, 남양유업 창업자인 홍두영 회장과 그의 아들 홍원식(남양유업 회장), 홍철호(굽네치킨 사장) 등이 있다. 당홍의 주요 집성촌은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동덕리,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남양리,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충남 연기군 서면 신대리, 충북 옥천군 안남면 화학리, 평남 강동군 봉진면 봉당리, 평북 삭주군 남서면 창신동, 평북 정주군 말산면 신오동, 함남 홍성군 홍서읍 내원리,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석천리 등이다.
 
토홍계
근현대에 들어와 토홍계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중 독립협회 간부였던 홍정후洪正厚가 있으며, 봉선화의 작곡가이면서 근대 음악계의 거장인 홍난파洪蘭坡(본명은 英厚)가 있다. 홍난파는 경기 수원 출신으로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수업한 뒤 ‘봉선화’를 작곡하였으며, 1925년엔 우리나라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음악잡지인 ‘음악계’를 발간하였으며,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냈다. 또 이화여전과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서양음악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며, ‘봉선화’ 외에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과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를 작곡했다. 또 문학에도 재능을 보여 소설로 ‘향일초’, ‘처녀혼’, ‘폭풍우 지난 뒤’ 등을 저술하였다. 또 같은 수원 출신으로 시인이었던 홍로작洪露雀(본명은 사용思容)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 하나’ 등을 지었고, 토월회 동인으로 연극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외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된 홍사익도 토홍계이다.

현대에 들어와 토홍계 인물로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홍재선, 대한변협회장을 역임한 홍승만, 한국일보 부회장을 역임한 홍유선,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홍사중이 있으며, 정관계에서는 홍사덕(전 국회의원, 민화협 상임의장), 홍승직(고려대 교수), 홍사석(연세대 의대 교수), 홍사풍(고려인삼 회장) 등이 있다. 토홍의 집성촌은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평택시 송탄읍, 포천시 군내면, 김포시 검단면, 화성시 남양면 일원, 충북 중원군 노은면·앙성면, 음성군 금왕읍, 충남 부여시 양화면·석성면, 아산시 인주면 일원, 당진시 송산면, 전남 함평군 손불면, 경북 영풍군 단산면, 봉화군 봉성면 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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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역관 홍순언과 해주 석씨의 이주
홍순언洪純彦(1530~1598)은 남양 홍씨 예사공파로 선조 임금 때 중국어 역관譯官을 지냈다.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가는 길에 통주通州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그날 밤 일행은 유곽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순언은 하얀 소복을 입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사연인즉 여인의 부모는 절강浙江 사람인데 북경에 와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두 분이 돌아가시고 관이 객사에 있다고 한다. 외동딸로서 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으므로 마지 못하여 스스로 나왔다고 하였다. 공이 듣고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를 물으니 3백 금이 필요하다 하기에 곧 전대를 털어서 주고 끝내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여인이 성명을 물었으나 끝까지 말하지 않았는데, 여인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려 하시면 저도 감히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성만 말하고 나오니, 동행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보라고 비웃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순언은 나랏돈을 함부로 쓴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에 동료 역관들이 돈을 걷어 순언이 횡령한 돈을 갚아준 뒤 그를 구명해준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당시 조선은 200여 년간 골머리를 앓아온 외교문제가 있었다.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잘못 기록된 왕실의 가계를 시정하기 위해 명나라에 주청한 일)이다. 태조 이성계의 부친은 이자춘李子春인데 고려 말 이성계와 권력 다툼을 했던 정적 이인임李仁任으로 기록돼 있었던 것.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명회전의 정정을 요구하는 진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차일피일 미루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자 선조는 이번에도 실패하면 사신을 따라간 수석 역관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공언한다. 이것이 동료 역관들이 그를 구해준 이유였다. 1584년 순언은 무거운 가슴을 안고 종계변무 사신의 일행으로 북경으로 간다. 그런데 순언이 북경의 조양문朝陽門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예부 시랑禮部侍郞(외교부 차관) 석성石星과 그의 부인 류柳씨였다. 부인은 그동안 조선에서 역관이 방문할 때마다 그를 찾고 있었다. 그 부인은 오래전에 순언이 유곽에서 만난 여인이었다. 당시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던 부인은 보은報恩의 절이라며 큰절까지 올린다. 순언의 처지를 파악한 부인은 이번에는 물심양면으로 외교직무를 도와준다. 남편인 석 시랑이 분주히 뛰어다닌 끝에 대명회전 만력본에 태조의 가계도가 바로잡히는 성과를 낸 것이다. 순언이 종계변무를 무사히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예부 시랑의 아내는 나전함 10개에 각 10필씩 직접 짠 비단을 넣어 보냈는데, 비단마다 ‘보은報恩’이라는 수를 놓았다고 한다. 조선 왕실의 오랜 숙제가 해결되자 선조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순언을 종2품의 우림위장羽林衛將으로 임명한다. 이는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사령관으로 역관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위치로 파격승진이었다. 당릉군唐陵君이라는 군호도 하사받는데 이는 왕실과 핏줄이 같다는 의미였기에 신하로서는 최고의 명예였다. 순언과 석성 부부와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다. 조선 입장에서는 명나라의 구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조선 파명을 주저했는데 당시 병부상서兵部尙書(국방부 장관)의 위치에 있었던 석성만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석성은 명나라 조정의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역관 순언을 급히 불러들여 조언해준다. “조선에서 명나라를 믿게 하기 위해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원병을 청하시오. 사신만 오면 내가 힘을 쓸 것이오” 석성의 노력에 힘입어 결국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하게 되고 기나긴 7년의 조일朝日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전쟁 중에 순언은 통역관이 되어 이여송을 따라 다녔다. 순언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 사망했다. 명나라는 전쟁 후 막대한 군비 소모와 인명 손실로 나라가 기울게 되는데 파병을 적극 주장했던 석성은 문책을 당해 투옥된다. 1599년 옥사한 석성은 죽기 전에 부인 류柳씨와 아들 둘에게 자신이 죽으면 명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가라고 유언했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유언에 따라 즉시 그의 아들 중 차남 석천石洊은 1597년(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星州 대명동大明洞에 정착하면서 성주 석씨星州石氏가 되었다. 그러나 부인 류씨와 장자 담潭은 차마 부친 곁을 떠나지 못하고 옥바라지를 하며 남았다가 명조明朝에 잡혀 유배된다. 후에 장남 석담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를 모시고 조선의 해주海州에 이르게 된다. 이에 왕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로 사관賜貫하였다. 이로서 이 땅에 해주 석씨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이 성씨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을 바꾸게 된 아름다운 이야기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http://blog.naver.com/tlfdksro7)
남양 홍씨 대종회 홈페이지(http://cafe.daum.net/namyang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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