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 진씨驪陽陳氏 가문에는 고려 시대에 백운소설을 쓴 이규보와 쌍벽으로 알려진 매호梅湖 진화陳澕라든지,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진무성陳武晟 장군 등이 있다. 진陳씨는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 1억여 명이 살고 있다. 이번 달에는 여양 진씨에 대하여 다루어 본다.
고려 예종 시기에 진총후陳寵厚가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져 여양 진씨驪陽陳氏의 시조가 되었다. 「여양진씨대동보驪陽陳氏大同譜」에 의하면 시조 진총후는 고려 예종(1106~1112) 때 상장군上將軍 겸 신호위神虎衛의 대장군으로 적신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여양 진씨의 유래에 대하여 북송 복주福州 사람이며 우윤을 지냈던 진수陳琇라는 사람이 요금遼金의 난을 피해 고려로 망명하여 여양현(현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덕양산 아래 터를 잡고 살았는데 진총후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양진씨사적驪陽陳氏史蹟에는 진수가 북송 휘종(서기 1100~1125년) 대의 사람이고, 그 후손인 진총후는 서기 1100~1122년에 벼슬이 신호위대장군 겸 상장군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다. 여양 진씨 대종회 홈페이지의 ‘진씨의 유래’에는 “진총후가 진수의 후손이라는 확증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바란다.”고 쓰여 있다.
오늘날 진씨의 관향은 여양 말고도 경주·신광·삼척·나주·강릉·흥덕·홍주·덕창·남해·여주·진산 등 여러 본이 있으나 모두 진총후의 후손으로 오늘날에는 여양으로 합보合譜하여 나주·강릉·삼척파로 통일하고 있다.
참고로 진陳을 성으로 한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간간히 볼 수는 있으나 여양 진씨와 구체적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의 묘지명이 발굴됨으로써 삼국 시대 백제에도 이미 진씨陳氏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2013년 10월 3일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진법자의 관등은 2등인 은솔恩率로 품달군稟達郡의 군장郡將을 지냈다고 하는데 품달군은 백제부흥운동기의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군장을 지냈다는 풍달군風達郡과 같은 지역이다. 풍달군은 현재의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 고려 초기에 이미 진陳이라는 성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있다. 『고려사』를 찾아보면 태조 때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된 진선陳瑄이 있고, 현종 때인 1014년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뒤에 겨우 돌아온 진적陳頔의 관작을 올려 주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진총후 생존 당시에도 또 다른 진씨 인물들이 나오는데, 1135년 묘청의 난에 진경보陳景甫와 진숙陳淑이 부사副使로 출정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1140년에는 진경보를 상서우복야 겸 상장군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151년에는 의종이 진숙의 죽음을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철회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모두 여양 진씨의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로, 역시 진陳을 성으로 쓰는 한국의 다른 집안의 족보에도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진씨들은 진씨가 중국 대륙을 포함 동남아 일대 등에 1억여 명이 살고 있어 동양의 대성大姓이라고 말한다. 현재 타이완의 타이베이臺北에는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진씨들의 친목을 다지는 국제기구인 ‘진씨세계종친회’가 있다.
시조 진총후陳寵厚의 아들인 진준陳俊은 병졸의 대열에서 발탁되어 고려 명종 2년(1172년) 동북병사행영東北兵馬使行營 겸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에 올랐으며, 그 뒤 좌군병마사·참지정사·판병부사 등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덕장으로 알려졌다. 진준은 의종 24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무신들이 문신들의 가족까지 대량 학살을 하자 같은 무신이면서도 문신의 무차별 살해를 적극 반대해 많은 문신 가족들을 죽음에서 구했다.
훗날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음덕陰德이 있으니 뒷날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된 것은 진준의 이 같은 덕행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의 아들 광순光純(대장군·광수光脩(병부상서)·광경光卿(대장군)·광의光儀(대장군)·광현光賢(상장군) 등 5형제 또한 고려의 무신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렇듯 여양 진씨驪陽陳氏 가문은 처음에는 문文보다는 무武로써 가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뒤 전통적인 무신의 가문에 ‘문文’을 꽃피운 대문장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신종神宗~강종康宗 때의 진화陳澕다. 호는 매호梅湖이며 자는 대경大景이다. 매호공梅湖公, 진한림陳翰林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는 강종 2년(1213년) 한림학사를 거쳐 서장관書狀官(외교 실무자)으로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우사간右司諫·지공주사知公州事 등을 역임했다. 그의 시재詩才는 고려의 대문장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와 쌍벽을 이루어 고려 고종 당시 한림제유翰林諸儒의 합작품인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는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이라고도 했다.
특히 매호의 작품으로 유명한 것은 그가 서장관으로 금나라에 갔을 때 지은 ‘봉사입금시奉使入金詩’다.
“서화이소삭西華已蕭索 북채상혼몽北寨尙昏蒙 좌대문명단坐待文明旦 천동일욕홍天東日欲洪(서쪽의 중화는 쓸쓸히 기울고 북채는 아직도 혼몽 속에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데 하늘 동쪽은 붉은 아침 해가 솟으려 하네).”
이런 내용의 시는 당시 아시아의 정세와 고려의 앞날을 예언한 명시로 조선의 문신들에게까지 널리 읊어졌다.
매호의 작품은 ‘매호유고梅湖遺稿’로서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에 약간 전해지고 있다. 당대의 대문장 이규보李奎報는 “공公의 장편長篇은 사어辭語가 분방하여 실로 하늘 밖에서 노닌다.”고 극찬했다.
진화의 형 진식陳湜·진온陳溫 등도 모두 시문으로도 이름을 날려 세간에서는 이들 형제를 구슬에 비유 ‘연주聯珠’라고 칭송했다 한다.
여양 진씨는 조선 초엽까지도 가문의 기반을 잘 유지했으나, 11대 중종中宗조의 권신 김안로 일당의 횡포에 맞서다가 역공을 받아 가문이 쇠퇴하였고, 이후 지방에 은거해 명맥을 이어 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여양 진씨가 이후 은둔의 세월만을 산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백의종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가문의 인물이 진무성陳武晟 장군이다. 그는 명종 21년(1566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15~16세 때부터 활쏘기에 능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불과 27세의 나이로 충무공에게 천거돼 충무공 오른팔 격인 비장이 되어, 선봉장으로 당포唐浦 해전 등 남해의 여러 대첩에서 전공을 쌓았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는 기록하고 있다. 특히 진무성은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적정을 정확히 탐지하여 적을 몰살했으며, 충무공이 전사하자 그의 유해를 고금도古今島 본영으로 운상運喪한 뒤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중군으로 통제사의 직무를 대행하다 강화도로 피난할 때 풍랑으로 미처 못 따라갔는데, 이에 격분한 인조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임금께서 정말 포사를 보냈다면 후임을 보냈을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 너는 첩자다.”라고 하며 그를 오히려 죽이려 했다. 뒷날 이 얘기를 들은 인조는 “과연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그를 귀성부사龜城府使에 임명했다.
진 장군의 유품으로는 길이가 2척 4촌인 칠성검과 교지 5점 등이 전해져 임진왜란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 장군의 출생지이며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전남全南 고흥군高興郡 두원면豆原面 신송리新松里 무열사武烈祠에는 1979년 장군의 동상이 건립됐다.
<#여양 진씨의 분파分派와 그늘#>,
여양 진씨는 진총후陳寵厚의 증손(4세) 대에 시중공(담)파侍中公(湛)派·어사공(식)파御史公(湜)派·예빈경(온)파禮賓卿(溫)派·매호공(화)파梅湖公(澕)派⋅전농공(택)파典農公(澤)派 등 5개 파로 나뉘게 된다.
여양 진씨는 조선 초기까지 착실히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조선조에서 배출한 문과 급제자 수만도 27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연산군조 기묘사화 때 진건陳騫이 화를 당하자 이로 인해 진씨 일족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고, 중종 때에는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일으킨 정변에 휩쓸리면서 진씨 가문은 쇠퇴하며 그늘을 걷게 된다.
중종 19년,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안로는 심정沈貞·이항李沆 등 충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수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명신 이언李彦·정광필鄭光弼 등을 귀양 보내면서 자신의 세력 구축을 위해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여양 진씨 문중의 진우陳宇(태학장의太學掌議)가 김안로의 횡포를 탄핵하려다 김안로 일파의 보복을 받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진식陳寔의 형인 진우는 궁궐 뜰 안에서 살해당하고 그의 후손 일족은 충남 연기군 반곡盤谷, 경남 영산靈山, 전남 영광靈光 등 각 방면으로 은거해 가문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여양 진씨와 관련 있는 성씨로 삼척 진씨三陟陳氏가 있다. 삼척 진씨의 시조 진경陳鏡은 고려 태조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상서尙書를 지내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후에 시중侍中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그는 태보太保를 지냈는데, 그의 선대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진경의 16세손 진의陳懿가 1296년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져서 삼척 진씨의 본관조가 되었다. 진양 진씨 측에서는 삼척군 진의가 진총후의 5세손이라 하며 여양과 삼척은 한 할아버지의 같은 후손이라고 주장하나 삼척 진씨 쪽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여양 진씨와는 뿌리가 다른 광동 진씨廣東陳氏도 있다. 그들은 서기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오위도총관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 수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진 고금도에서 전공을 세우고,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진 진린陳璘을 시조로 받든다.
양산 진씨梁山陳氏 역시 중국 양산 사람인 진보재陳普材를 시조로 한다. 그의 손자 진리陳理가 고려에 들어오자, 공민왕이 전답과 노비를 내리고 평한군에 봉했다고 한다.
진식陳寔(1519~156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고 아버지는 진복명陳福命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진黃璡의 딸이다. 1547년(명종 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대교·정언·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에 병조정랑, 검상·사인, 내섬시부정內贍寺副正, 전한 등을 역임했다. 1560년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의주목사로 출보出補(중앙 관리의 지방 임명)되었다가 1563년 공조참의와 동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온 뒤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1566년 대사간·호조참의, 다음 해 병조참지·부제학을 지내고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
일찍이 김안로의 횡포에 맞서서 그 일당을 탄핵하는 등 기개가 높았다. 진식의 형 진우가 김안로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자 홀로 궁궐 밖에 엎드려 억울함을 상소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진식의 높은 기개가 알려지게 되었다.
진극원陳克元(1534~1595)은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이다. 자는 경여敬汝, 호는 월와月窩, 초명은 수창守昌이다. 이조정랑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사화士禍를 피하기 위해 경기 파주에서 남하하여 합천 초계로 이거하였다.
그 뒤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명종과 인성왕후의 국상에 3년간 예를 갖추었으며, 부모상에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중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월와일고月窩逸稿」가 전한다.
진채선陳彩仙(1847~?)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났다. 신재효에게서 판소리 지도를 받았고, 정악에도 능하였다.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서 출중한 기예를 발휘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고, 흥선대원군의 아낌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판소리에서 최초의 여성 명창이 되었다. 「춘향가」, 「심청가」를 잘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자, 그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명성황후에게 죽임을 당하였거나 중국 등으로 도망쳐 조용히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의 사망 연도 또한 확인 불가이다. 영화 〈도리화가〉는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진대제陳大濟 - 1952년 출생, 대한민국의 정치인, 기업인이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2003년부터 2006년 3월까지 노무현의 참여정부에서 제9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미국에서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 박사를 취득하고 IBM, 휴렛팩커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삼성전자 반도체 임원으로 근무하였고, 세계 최초로 16메가 D램을 개발했다. 2006년 10월부터 IT 기업 전문 펀드운용인 업체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진수희陳壽姬 - 1955년 출생,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7·18대 국회의원과 제3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1955년 충청남도 대덕군(현 대전광역시)에서 태어나 대전여자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나온 후 한국개발연구원에서 근무했다. 1991년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의도연구소 선임연구위원과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전자팔찌 제도>를 도입하여 아동 성폭력 범죄를 예방하고자 하였으며, 학교 촌지 수수 관행을 근절하고자 <학교촌지 수수의 예방 등에 관한 특별법안> 등을 대표 발의하였다.
진웅섭陳雄燮 - 1959년 출생, 대한민국의 제10대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공무원이다.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건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행정고시 28회로 공직에 진출했다. 2012년 새누리당 수석전문위원으로 갔다가 그해 금융정보분석원 원장을 맡았다. 2014년 2월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11월까지 일했다. 2014년 11월부터 2017년 9월까지 금융감독원장을 지냈다. 2020년 9월 법무법인 광장에서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여양 진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