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씨 (연주)

한국주요성씨


현씨 (연주)

세계성씨연맹 0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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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검을 현玄 자를 쓰는 연주 현씨延州玄氏 56,047명, 성주 현씨星州玄氏 15,995명, 순천 현씨順天玄氏 1,358명, 연일 현씨延日(?)玄氏 1,290명, 창원 현씨昌原玄氏 2,053명, 기타 현玄씨 12,081명으로 총 88,824명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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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현씨延州玄氏의 연원


현玄씨의 시조는 시랑공侍郎公 현담윤玄覃胤이다. 고려 의종毅宗조에 장군이 되었고, 명종明宗 때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연산군延山君에 봉해졌다. 연주延州와 연산延山은 평안도 영변寧邊의 옛 이름이다. 따라서 후손들이 연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씨는 대개가 연주 현씨 시조 현담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정묘보丁卯譜〉 문목問目에 보면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2세 현덕수玄德秀가 시조이고, 창원 현씨昌原玄氏 역시 2세 현덕유玄德裕를 시조로 하고, 순천 현씨順天玄氏는 현덕수의 둘째 아들 현원고玄元羔가 시조라 하였다. 따라서 현씨이면서 이본異本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은 시랑공侍郎公 자손들의 관직 임지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묘보丁卯譜〉(1747)를 발간하면서 연주 현씨로 통일하였다. 그로부터 연주 현씨 대동보를 계수하여 7차의 과정을 거쳐 〈임술보壬戌譜〉(1982)를 편간編刊, 전국 연주 현씨 종원宗員이 소장하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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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사의 개요


<,연주 현씨延州玄氏 흥성의 계기>>
연주延州는 지금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옛 지명地名인데, 현씨는 시조 현담윤玄覃胤 이전부터 연주의 토착 세력으로 이곳에서 큰 세력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연주 현씨가 고려 시대에 중앙 정부의 관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 것은 명종明宗 6년에 있었던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한 공을 세운 것에 기인하는데, 당시 현담윤의 직책은 도령都領이었다.

도령은 도령중랑장都領中郎將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려 시대 주현군 조직의 최고위직이다. 연주의 현씨는 향리 조직 중에서도 상층에 속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씨가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은 시조 현담윤과 세 아들인 현덕수玄德秀, 현이후玄利厚, 현덕유玄德裕가 조위총趙位寵의 거병 때 중앙 정부에 세운 공을 기반으로 중앙의 관료로 진출하게 된 데에서 연유한다.

연주 현씨의 시조인 현담윤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그의 큰아들 〈현덕수전玄德秀傳〉에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신도비명神道碑名」(윤치겸尹致謙 찬撰)에 의하면 그는 의종毅宗 대에 갈로羯虜 부족이 국경을 침범하자 19세로 의병을 일으켜 격퇴하였고, 그 공으로 연산부사延山府使에 제수되었다. 여진女眞이 송宋을 침범하자 고려에서 송에 구원병을 보내게 되었는데, 현담윤은 대장으로 출전하여 대승하고 귀국한 후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명종明宗 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인 정권의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을 토벌한다는 명문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城이 모두 그에 호응하였다. 이때 연주성만이 호응하지 않고 성을 지키면서 반군 측에서 보낸 사신을 잡아 죽였는데, 현담윤이 도령으로 연주 주현군을 통솔하는 최고 책임자로 있었다. 조위총의 반란이 평정된 후 문하시랑평장사의 직에 제수되고 연산군延山君에 봉해졌다.
 

연주 현씨 시조 현담윤의 묘
시조 현담윤이 세상을 떠나고 치른 장례식 때의 일이 지금도 전한다. 장례식 상여가 오리정이라는 곳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나오기에 상여를 멈추고 영령 앞에 간단히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 예를 올리게 되었다. 예식이 끝난 후 상여를 다시 들려고 하였는데 상여가 땅에 뿌리내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이곳에 묻히시고 싶은 뜻이 있으신가?” 하고 누가 말하자, 그때에야 비로소 상여가 움직여 결국 그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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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문하시랑 현담윤의 초상화, (우)현담윤의 후손 현징이 지은 죽림정 


 

시조 현담윤의 세 아들


시조 현담윤의 세 아들 중, 현덕수玄德秀는 어려서 연주분도장군延州分道將軍 김치규金稚圭에 발탁되어 서울에 올라가 공부하고,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병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와 함께 성을 고수하였고, 주민들에 의해 권감창사權監倉使가 되었다.

반란이 평정된 후 내시기후內侍祇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안남도호부사安南都護副使로 임명되었다. 정치가 청렴하고 밝아 관리와 백성들이 공경했고, 음사淫祀(귀신에게 제사 지냄)를 엄히 금했다. 병부낭중兵部郎中, 사재소경司宰少卿을 거쳐 신종神宗조에 전중감殿中監을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했다. 처음에 팔거군八莒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다.

현이후玄利厚는 조위총의 반란 평정 후에 그 공으로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에 제수되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연주성에서 반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주민州民들에 의해 권행병마사權行兵馬使에 추대되기도 했다.

현덕유玄德裕는 명종 16년에 등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호학하였는데, 당시의 집권자였던 최충헌을 꺼려 오랫동안 산지散地에 있었다 한다. 이부시랑吏部侍郞, 예부시랑禮部侍郞,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대사공大司空에 이르렀고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졌다.
 

3세조 이후 연주 현씨延州玄氏


3세조인 현원렬玄元㤠은 충렬왕忠烈王조에 태복윤太僕尹을 역임하였고, 현원고玄元羔는 영동정令同正으로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봉해졌다. 현원빈玄元賓은 도령낭장道領郎將을 지냈고, 현원도玄元燾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현승玄昇은 희종熙宗조에 등과하여 강종康宗・고종高宗조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이부전서吏部典書・지태자국사知太子局事에 이르렀다.

4세조인 현경여玄敬輿는 중현대부中顯大夫・전객령典客令을 지냈고, 현보玄甫는 영동정令同正, 현문홍玄文弘은 검교군기시감檢校軍器寺監, 현경玄璟은 합문기후閤門祇侯, 현장玄璋은 강화윤江華尹,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냈다.

5세조인 현금玄嶔은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올랐으며, 현간玄簡은 안남도호부사安南都護府使, 상의사도尙衣司徒를 역임했다. 현문혁玄文赫은 원종元宗조에 도원수都元帥에 제수되었고, 현상혁玄象赫은 충렬왕忠烈王조에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다. 현치룡玄致龍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현계룡玄繼龍은 영동정令同正, 현서룡玄瑞龍은 좌승선左承宣을 지냈다. 현충수는 문과를 거쳐 승지동정承旨同正, 현권玄權은 좌승선左承宣, 현태로玄台老는 충목왕忠穆王조에 문과를 거쳐 예문관직제학, 판도판서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현우玄佑는 전객부령典客副令을 거쳐 지초토영전사知招討營典使를 지냈으며, 현적玄覿은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렀다.

이후로도 여주 현씨 가문에서는 현옥량玄玉亮, 현용무玄用武, 현규玄珪, 현득원玄得元, 현득형玄得亨 등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는데,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현상벽과 현봉겸이 있다. 현상벽玄尙璧은 호가 관봉冠峰이며 세칭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분이다. 수의부위修義副尉・세마洗馬를 지내고 경학과 예설에 정통하였으며 후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문집으로 〈관봉집冠峰集〉이 있다. 현봉겸玄鳳謙의 호는 심암, 서도의 대표적인 학자로 정통재正統齋를 세우고 후진을 가르쳤는데 학도가 사방에서 모였다 한다. 경례이기설經禮理氣說이 있다.
 

반란군마저 감동시킨 충의장군忠義將軍 현득리玄得利


현득리玄得利가 조선 세조世祖 때 전주 판관으로 재직할 때 관북의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현득리는 전라도 병정 700명을 인솔하여 함경도에 출전하였다. 판관 현득리는 출전하는 날에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 부인 전全씨에게 주며 “내 죽음을 각오하고 역적을 치러 가오. 적이 강성하여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내 손가락을 주고 가는 바이오. 이 손가락이 혈색이 좋으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고 혈색이 죽으면 내가 죽은 것이니 그때는 이 손가락으로 장사를 지내시오.” 하며 출정하였다.

부인은 남편이 장도에 오르는데, 마음을 어지럽게 할까 하여 눈물을 감추고 붉은 피가 떨어지는 손가락을 비단에 싸서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비단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다행히도 현득리가 출전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선홍빛 손가락이 여전하였다. 현득리 판관의 안부와는 관계없이 시간이 지나면 잘린 손가락이 변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기이하게도 출전한 후 달포가 지나도록 손가락이 선홍빛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전씨 부인은 세수하여 몸을 정결하게 한 후, 단정하게 꿇어앉아 비단 주머니를 풀어 보니, 어제까지도 살아 있던 손가락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부인은 남편이 전사했다 생각하고 대성통곡하였다. 하루가 지난 후, 말의 울음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남편이 출동할 때 타고 간 말이 입에 화살을 물고 달려와 있었다. 부인은 이제 판관공이 전사함이 틀림없으므로 의리를 챙기고 손가락을 염습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남편이 타던 말도 며칠 후 죽어 남편 묘 아래에 묻어 주고 충마상을 세웠다. 현득리의 묘소는 충남 천안시 풍세면에 있다.

판관 현득리는 함경도에 출전한 후 내소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진 깊숙이 진격하였다. 당시 함경도민은 모두 이씨의 편이기에 고립무원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칼도 부러졌다. 맨손이 된 현 판관에게 적은 항복할 것을 권고하다가 듣지 않자 격살하고 말았다. 당시 적도들은 현 판관의 의연한 죽음을 보고 “충의장군 현득리를 이곳에 매장하다. 사람들은 이곳에 우마를 놓아 밟는 일이 없도록 하라.(忠義將軍玄得利 埋北庭 人不放牛馬踐踏)”라고 표목을 세웠다. 이 내용은 구암 이정 선생이 기록한 함경도 고적기에 수록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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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흥남 대철수 때 10만 명을 살려내다


현봉학玄鳳學(1922~2007)은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태어난 재미 의학자(임상병리학)이며, 한국전쟁으로 일어난 흥남 철수 작전 당시 9만 8천여 명을 살려 내 ‘한국판 쉰들러’로 불린다. 그는 함북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玄垣國 목사와 한국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申愛均 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연대 의대)을 졸업했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암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 버지니아 주립대학에서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해병대의 문관 겸 알몬드 미군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다. 현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대구에서 지인의 소개로 한국 해병대의 문관이 됐다. 해병대를 따라 강원도 고성에 머물다가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인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 철수 작전에 관여했다. 당시 피난민이 함께 승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미군 측을 설득해 9만 8천여 명을 메러디스 빅토리SS Meredith Victory호 등 수송선에 싣고 거제도로 옮기게 했다. 당시 피난민들은 선박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차량 및 장갑차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를 건너는 심정으로 거제도로 갔다고 회고한다.

또 현봉학은 서재필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 안창호, 안중근, 장기려 등을 기리는 사업과 우리 민족 서로돕기 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 고문을 맡았으며, 윤동주의 묘를 찾아내 단장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나무 박사 현신규, 숲이 울창한 한국을 이루다


현신규玄信圭(1911~1986) 박사는 한국 임학의 대부이자 산림녹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분이며, 한국인 1호 임학 박사로 세계적 육종 연구 업적들을 남겼다. 더 중요한 것은 헐벗었던 국토를 울창하게 바꿔 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대표적 업적 세 가지는 리기테다소나무 교배, 이태리포플러 보급, 은수원사시나무의 개발이다.

식민 지배와 6.25 전쟁으로 한국의 산山은 다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빨리 산에 나무를 채우는 게 급선무였다. 현 박사가 육종하고 보급한 나무는 20년을 키우면 20~30미터 자라는 속성수들이다. 이런 나무 수억 그루가 1950~1980년대에 심어졌다. 리기테다소나무는 수원의 서울대 농대 임학과 교수로 있던 현 박사가 1951~1953년 미국 연수 시절 리기다소나무 암꽃에 테다소나무 꽃가루를 교배해 수백 개의 종자를 만든 후 국내로 들여와 개량한 나무다. 리기다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추위에 강하지만 생장 속도가 느리고 재질이 좋지 않았고, 테다소나무는 정반대였다. 이 두 종류의 나무에서 장점만을 골라 리기테다소나무를 개발한 것이다.
1954~196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이태리포플러 330종을 들여와 우리 풍토에 맞는 것을 골라 보급했다. 장기영 씨가 사장으로 있던 한국일보가 1964년부터 ‘포플러 1억 그루 심기 운동’을 펴 이를 뒷받침했다. 현신규 박사가 1986년 74세로 타계할 때까지 2억 9천만 그루가 심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태리포플러는 주로 하천가에서 자란다. 그러기에 현 박사는 산에서도 자라는 포플러 수종 개발에 애를 썼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은백양에 수원사시나무를 교잡한 잡종 포플러인 은수원사시나무이다. 은수원사시는 빨리 자라는 데다 짙은 그늘을 만들고 오염에 견디는 힘이 강해 가로수로 많이 보급됐다. 1973년 박정희 정부가 치산녹화 10년 계획을 세울 때 리기테다소나무, 이태리포플러, 은수원사시는 모두 10대 권장 수종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은수원사시나무 개발 공로로 나무 이름을 현 박사 성을 따라 부르도록 했다. 그 후로 은수원사시는 ‘현玄사시나무’가 됐다. 산림청은 2001년 식목일에 현신규 박사, 박정희 대통령, 김이만 나무 할아버지, 조림왕 임종국 등 4명을 광릉국립수목원에 마련한 ‘숲의 명예 전당’에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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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신규 박사와 리기테다소나무


 

연주 현씨 가문의 역사상 주요 인물


현덕승玄德升(생몰년 미상) - 호는 희암希庵, 문과로 급제하여 조선 선조宣祖 때 지평持平・사예司藝를 지냈으며 문장과 필법이 탁월하였다. 충무공 이순신과 왕래한 편지가 현재 국보 제76호로 아산 현충사에 보전되어 있다. 문집으로 〈희암집希庵集〉이 있으며 천안육현사天安六賢祠에 배향되었다.

현이규玄以規(생몰년 미상) - 호는 백암白庵, 학문과 예절이 관북에 특출하였다.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고 의학・복서・산수의 책도 널리 통달하였다. 문집으로 〈백암집白庵集〉이 있다.

현상벽玄尙璧(1673~1731) - 호는 관봉冠峯, 권상하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이간李柬과 함께 낙론洛論에 속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간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동조하면서도 세부 이론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고 양론의 절충과 화합을 지향하였다. 시에 뛰어났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문집으로는 〈관봉문답冠峯問答〉, 〈관봉유집冠峯遺集〉이 있다.
 

연주 현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현병철玄炳哲(1944년~현재) - 한양대학교 법학과 교수를 지낸 대한민국의 법학자이며, {[제5~6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오석玄旿錫(1950년~현재) - 대한민국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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