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씨의 유래
진주 형씨의 시조 형옹邢顒은 당 나라 태종 때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7년(서기 634년) 영류왕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진주 형씨 세보 별록’에 따르면 그는 고구려에 들어와 당나라의 문화, 문학, 유교의 보급에 공헌하였다고 하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됐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정1품 보국輔國 벼슬에 이르렀으며 남양南陽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 후 후손 형방邢昉이 고려 명종 7년(서기 1177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 대광보국大匡輔國을 지냈고, 형공미邢公美가 충렬왕 6년(서기 1280년)에 문하시중으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구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진주晋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중국에서 형邢씨의 유래는 주周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주공周公 단旦의 넷째 아들 정연靖淵이 주 성왕成王으로부터 형나라의 후작侯爵으로 봉한 것이 그 시작이다. 진주 형씨의 주요파로는 판서공파(파조派祖:형군소邢君紹)와 병사공파(파조:형군철邢君哲)가 있다.
진주晉州 형씨의 주요 인물
중시조 형병은 고려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서기 850년경 출생하였는데 우리나라는 신라 문성왕 12년이고 발해 이진왕 21년이 되는 해이다. 이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전으로 당나라로부터 승려와 불경 등을 계속 받아들였다. 진주 형씨의 후손들은 시조 이후의 조상님들의 행적을 찾을 수 있는 많은 고서적을 찾아 연구했으나 시조 도래渡來 이후 고구려 멸망기까지 34년과 신라가 고려에게 망하는 서기 936년까지 302년간의 조상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고려 충목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형방邢昉을 1세조로 하여 전해져 오다가 계미대동보癸未大同譜(2003년 편찬)부터 옛 족보의 별록別錄에 기록되어 있던 상계上系를 인정하여 형병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2세 형적邢積은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신호위상장군神護衛上將軍(正三品)으로 활약했다. 서기 875년경 출생하여 928년 전사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싸울 때 임존성(예산 대흥성) 전투에서 형적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3세 형순邢順은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어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던 서기 935년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들어가 이 같은 사실을 알린 인물이다. 석경당石敬瑭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937년 왕규와 함께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왕건 밑에서 문장과 지모를 발휘하여 밀직사密直史(從二品)에 추봉됐다.
13세 형방邢昉은 고려 명종 정유년(서기 11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충목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 대광보국大匡輔國을 지냈으며, 경상남도 진주晉州 반성斑城에 정착하였다. 진주 형씨에서 관향조로 모시고 있다. 묘는 수차의 병화兵禍를 입어 실전되었다.
15세 형공미邢公美는 시호諡號가 충선공忠宣公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내고, 충렬왕 6년(서기 1280)에 도원수가 되어 일본 일기도壹岐島에서 왜군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智密直司事로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18세손 형군소邢君紹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라는 시문詩文이 전한다.
19세손 형규邢珪는 조선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호조판서에 올랐다. 형규는 충직, 청백한 성품으로 임금의 잘못을 직간한 인물이다. 같이 있는 사람들은 훌륭함을 중국의 급암汲黯에 비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모든 신료가 형규 앞에서는 말을 항상 조심하여 올바른 말만 했던 엄격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묘는 남원시 주생면 비사곡에 있었으나 병화로 실전되어 1925년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산 140번지에 15대손 형기창이 종원들의 뜻을 모아 설단하고 비와 상석을 수립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형군소의 손자 형인기邢仁奇는 호조좌랑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형수邢琇는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둘째 형근邢瑾은 칠원현감漆原縣監을 지냈다. 그러나 1456년에 두 형제는 단종 복위를 꾀한 육신六臣의 석방 상소를 올린 후 신변이 불리하게 되어 형수는 전남 장흥으로 피하였다가 이후 후손들이 자리 잡고 있는 수원 지역으로 옮겨 대사간파를 이뤘다. 형근은 강직했다. 그는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을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못 이루고 함께 순절했다. 이 시기가 진주 형씨 가문에 가장 어려운 수난기였다. 셋째 형박은 거창으로, 넷째 형균邢均과 다섯째 형강邢鋼은 전주지방으로 각각 은거하였다. 이들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처가의 성을 따르기로 결의하고 발음이 비슷한 현玄씨로 성을 고쳤다고 한다. 가족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이자 형근의 아들 형계선邢繼善은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5일장을 치르고 도피해서 지리산으로 은거했는데 지금의 전북 남원군 사매면 대산부락이다.
이밖에 형자관邢自寬은 호가 모정茅汀으로 여러 고을의 현감을 지내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로 인해 청백리에 오르면서 가문을 빛냈다. 그리고 형의개邢義凱도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올랐다. 형세영邢世英은 어려서부터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강구하였고, 벼슬은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이르렀다. 성리학 연구에 힘써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씨족을 빛낸 분으로는 형운창邢運昌과 형협邢浹이 있다. 형운창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쳐 예빈사주부禮賓寺主簿에 올랐고, 정유재란 때에는 안골포수사安骨浦水使로 전공을 세웠으나 한산대첩에서 순절하였다. 형협은 병자호란 당시 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수행한 공으로 부녕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그후 효종이 즉위하자 금위장禁衛將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밖에 사복사정司僕寺正을 지낸 형태주邢泰冑,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형달도邢達道가 유명하다.
근대 인물로는 3.1운동 당시 활동한 형광욱邢光旭이 있다. 그는 항일운동에 앞장서 옥고를 치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항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형갑수邢甲洙도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동단大同團 전북 지단 총무부장의 책임을 맡아 독립을 위한 많은 활동을 하여 씨족을 빛냈다.
진주 형씨는 고려, 조선조에서 130여 명 이상이 6품 이상의 벼슬을 지냈고 효자, 열녀 30여 명을 배출하여 영, 호남의 명문대가에 버금가는 가풍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위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