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신천)

한국주요성씨


강씨 (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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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우리나라 강씨康氏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 충주忠州, 임실任實, 강령康翎 등 10여 본이 나타나지만 신천, 곡산, 재령 등이 대표적인 본관이다. 강康이라는 글자는 일곱째 천간 경庚 자와 쌀 미米를 조합한 글자인데, 경庚은 별을 의미하며 미米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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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강씨信川康氏의 연원


시조는 강후康候이다. 「강성호소록康聖浩所錄」에 따르면 주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 아들이 강康 자로 사성賜姓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봉해짐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위의 책은 제주현감을 지낸 강익보康翊甫가 보관하여 왔던 보첩譜牒에 따른 것으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지은 「평양지平壤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미보己未譜(1979)에는 시조를 강호경康虎景으로 하여 분파도를 만들고 그 13세손인 강지연康之淵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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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골 장군 강호경康虎景
강호경은 신라 때의 고관이었고 그가 강충을 낳았으며, 강보전康寳甸과 강보육康寳育은 손자가 된다. 대전 뿌리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신천 강씨의 유래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은 외가 조상인 강호경을 국조대왕國祖大王으로, 강보육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하였고, 세계는 고려 충렬왕 때 호종공신이었던 강지연康之淵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리하여 강씨康氏는 전국에 사는 누구이든 모두 중시조인 강지연의 후손이라고 ‘기미보己未譜’에서 밝히고 있다. 강지연은 고려 충렬왕조의 인물이며 몽고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신으로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성信城은 신천信川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그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중시조 강지연康之淵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와 문헌에 의하면, 중시조인 강지연康之淵은 고려 명종 때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서기 1231년 몽고군의 개경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할 때 왕을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올랐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을 신천으로 하게 되었다. 한편 ‘송도지松都誌’에 의하면 장단부長湍府 오관산五冠山은 강충康忠이 살던 곳이라고 쓰여 있다 한다. 강충은 시조 강호경의 아들로, 신라 때부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천군지信川郡誌에는 강씨가 이 고장 토착인으로 신수信水 북쪽에서 세거했는데, 고려 때 몽고의 외란에 중시조인 강지연이 충렬왕을 호종한 공으로 신성군에 봉해졌는데 신천에 세거해 온 데서 봉호가 된 것이라 하였다. 신천은 북한의 황해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이다. 고구려 때 승산군升山郡, 고려 초에 신주信州로 지명이 바뀌었다. 조선 태종 때에는 신천信川으로 바꿔 불렀고, 예종 1년에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1914년에 문화군文化郡과 합하였다.
 

신천 강씨 씨족사 개요


강康씨의 분파
고려 말의 홍건적紅巾賊의 침략으로 강씨 자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강씨는 장단과 신천 등지에서 여러 대 동안 세거하면서, 11세손 강문康文이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낸 뒤 철원에 터를 잡음으로써 평강파의 파조가 되었으며, 평강에는 13세손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강필康弼이 처음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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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파는 10세손 강집康諿의 자손이 해주海州⋅임천林川⋅양천陽川 등지로 흩어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임천파는 번성하여 11세손 강효업康孝業 이하 21세손에 이르기까지 세거의 터를 굳게 지켜 왔다.

강씨가 전남 영광靈光으로 세거지를 넓혀 간 것은 6세손 강유康旒 때다. 그는 조선 단종조의 대관大官으로 있다가 세조의 등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영광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강진파는 그의 9세손인 강응록康應祿이 이조정랑에서 물러난 뒤, 강진에 터를 잡음으로써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안주파는 9세손 강연康延이 성종 때 박천으로 옮긴 뒤 큰아들 강순석康順碩이 안주대가촌安州大街村에 옮겨 터를 잡음으로써 세거지가 되었고, 임실파의 강적康積은 사헌부감찰을 마치고 가산 땅에 들어가 살았다.

보령파의 강영康永은 강지연의 8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라감사를 지냈는데, 그 뒤 제주도에 들어가 제주파의 파조가 되었고 그 큰아들 강귀존康貴尊은 보령保寧에 터를 잡았다. 영변파寧邊派는 강자인康自仁이 성종 18년에 영변에 처음 터를 잡았고, 아우 강자의康自義는 운산雲山에 살게 되었다. 정주파定州派는 강맹문康孟文이 정주에 터를 잡았는데 그는 10세손이 된다. 임피파臨陂派는 8세손 강민康敏이 임피로 옮겨 감으로써 시작되었고, 강덕관康德寬은 해주에 살게 되었는데 9세손이 된다.
 
신라와 고려조의 신천 강씨들
중시조인 고려 때 인물 강지연康之淵의 상계는 강호경까지 13세가 된다. 이들 상계 인물들은 모두가 신라조와 고려조에서 높은 벼슬을 하였다. 강호경의 아들 강충은 상사찬아간上沙粲阿干을 하였고 강보전은 문하태학사, 강순산은 좌정승, 그 아들 강만루康萬嶁는 대장군, 강연창康衍昌은 우정승, 7세손 강태주康泰州는 형부상서, 그리고 강지연의 아버지는 문하좌찬성을 역임했다. 그런 명문의 출신답게 강지연도 충렬왕을 호종한 공신으로 신성군에 봉해졌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 무렵에는 신천강 이북에 강씨가 대성을 이루며 세거했다고 한다.

그 아들 강부전康富傳은 집현전전한集賢殿典翰이었고 아들 또한 신원부원군信原府院君에 봉해질 만큼 관직이 높았다. 이런 관력은 대를 이어 오면서 끊임이 없었다. 특히 6세손 강유康旒의 경우는 특기할 만하다. 그는 전과중시에 합격, 조선 단종의 특명으로 제포첨사薺浦僉使를 지냈으나 단종 손위遜位에 따른 불만으로 벼슬을 버리고 영광으로 남하, 은거해 버린 인물이다.
 
조선 시대 신천 강씨의 부흥
조선 시대에 들어와 강씨의 부흥을 이룬 이로는 아무래도 강윤성康允成을 꼽아야 될 듯싶다. 그는 강지연의 7세손이며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버지가 된다. 신천 강씨는 7세손 강윤성의 딸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로서 신덕왕후가 되면서 부흥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 같은 6세손인 강곤康袞은 단종조에 병사兵使로서 3등 공신이 되었는데, 조선 세조 때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록되고 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신천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예종 때 3등 공신이 되었고, 성종 때에는 익재공신이 되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7세손인 강치성康致誠은 세조 때에 문과에 급제, 춘추기사관春秋館記事官⋅한림翰林을 역임하였고, 6세손인 강서康庶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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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는 조선 태조의 계비로 뒤에 고황후高皇后로 추존되었고. 왕비의 오빠인 강득룡康得龍은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으로 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僉議政丞,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이 되었고 안정安靖이라 시호되었다. 그의 아우 강순룡康舜龍은 신천군信川君에, 6세손 강도康度는 충원백忠原伯에 봉해졌고, 아우 강제康濟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이었다. 신덕왕후에게는 왕건의 부인이었던 장화왕후莊和王后와 유사한 버들잎 설화가 있다.

강원기康元紀는 신덕왕후와 4촌 사이로 강윤의康允誼의 아들이다. 길재吉再, 권근權近, 정몽주鄭夢周 등 석학들과 어울려 경학과 문한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조선 태조의 등극을 못마땅히 여겨 끝내 두릉杜陵에 은거해 버리고 말았다. 강영康永은 8세손으로 문과에 합격, 한림원학사⋅전라감사를 지냈으며 문장文章⋅기절氣節⋅강개剛介의 인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 아들은 유훈을 받들어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제가창업齊家創業에 평생을 보냈다.

신천 강씨는 고려조에서 문벌의 세를 이어 오다 조선이 건국되고 신덕왕후가 배출됨으로써 상산부원군을 비롯한 현관과 봉작이 여러 사람 나왔다. 그러나 태종 때 왕자의 난亂으로 신덕왕후 소생인 두 대군이 화를 입게 됨으로써 그 영향이 강씨 일문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영재는 끊임이 없어서 적어도 조선 시대 중기까지는 이어졌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


주요 역사적 인물
강윤성康允成 - 중시조 강지연의 6세손인 강윤성은 고려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부시랑吏部侍郞 등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비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되어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곡산谷山으로 관향을 삼았다.

강득룡康得龍 - 재령파載寧派의 파조인 안정공安靖公 강득룡은 중시조 강지연의 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악산冠岳山 의상대義湘臺에 올라가 송경松京(개성)을 향해 통곡했고, 조선 태조太祖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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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康永 -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암공瀛巖公 강영康永은 신덕왕후의 사촌 오라버니로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제주에서 일생을 마침으로써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가 되었다.

강순康純 -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증손으로서, 1453년(단종 1년) 회령부사會寧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1457년(세조 2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67년(세조 12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 등지에서 공功을 세워 난이 평정되자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현대 주요 인물
강경화康京和 - KBS 초창기 아나운서인 아버지 강찬선과 어머니 김길임 사이에서 1955년 태어났다. 1964년에 아버지 강찬선이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되면서 2년간 미국에 거주하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회의장 국제비서관, 세종대 조교수를 거쳐 1999년 당시 외교통상부 홍순영 장관의 보좌관으로 특채되기도 했다. 후에 김대중 대통령의 통역사로 3년간 활동했었는데,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통역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김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자 관료로서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를 지냈고, 문재인 정부의 첫 외교부장관임과 동시에 한국 최초의 여성 외교부장관이 되었다.

강도영康道永 - 강풀이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웹툰webtoon 작가이다. 이 필명은 학창 시절 풀색의 군복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얻은 별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에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스토리 형식의 웹툰인 순정 만화를 연재하면서 한국 만화사漫畵史에 한 획을 그었고, 순정 만화의 대성공으로 파란, 엠파스, 네이버, 야후 등 다른 포털사이트에서 웹툰 서비스를 개시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웹툰 연재 시스템 정착에 기여한 인물로 손꼽힌다. 우여곡절을 거쳐 2002년 6월 강풀닷컴을 만들었고 엽기 개그 만화물인 <일쌍다반사>를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네티즌들의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강풀은 옴니버스 웹툰이나 에세이툰 위주였던 한국 웹툰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음으로써 웹툰 장르의 다양화를 선도하였다.

강만흥康萬興 - 탤런트 강석우란 이름으로 알려진 강만흥은 실향민 가정에서 아버지 강중록康仲祿과 어머니 전주 김씨 김병숙金炳淑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8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 《여수》에서 당대 톱 배우 윤정희의 상대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1985년에는 《이방인》으로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現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대 초 인기 드라마 《보통사람들》에 출연하는 등 미남 배우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출연작으로 《학교》, 《아줌마》, 《반올림2》, 《열아홉 순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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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강씨의 분관


곡산 강씨
곡산 강씨谷山康氏의 시조로 받드는 강서康庶는 신천 강씨의 중시조인 강지연의 6세손으로, 상산백象山伯으로 봉해지면서 곡산 강씨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강윤성康允成은 조선 태조 때 국구國舅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곡산은 황해북도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940년(태조 23년)에 곡주로 개편되었다가, 1393년(태조 2년)에는 곡산으로 개칭되고 부로 승격하였으며, 태종 때는 곡주에서 다시 곡산군으로 격하되었다. 별칭으로 덕돈홀德頓忽⋅고곡古谷⋅상산象山 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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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강씨
재령 강씨載寧康氏의 시조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 강득룡康得龍은 신천 강씨의 시조 강호경康虎景의 8세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삼사무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품고 관악산 의상대에 올라 송경(개성開城)을 향해 통곡하니 이때부터 이곳은 연주대라 불렸다. 그 후손이 재령載寧으로 낙향하며 살면서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안릉은 재령의 옛 명칭이다.
 
충주 강씨
충주 강씨忠州康氏 시조 강도康度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시조 강지연康之淵의 5세손으로 충원백忠原伯에 봉해지면서 관향을 이루게 되었다. 중시조인 충순위忠順衛 강세운康世雲의 아들 강칭康偁(1542년생)이 1579년(선조 12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제주 강씨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시조는 강영康永이다. 제주도에 신천 강씨가 정착하게 된 계기는 조선 초 1398년(태조 7년)에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때 왕위 계승 문제로 신덕왕후의 소생 이방번⋅이방석이 화를 입었을 당시 당시 전라감사로 있던 강영康永이 제주도로 유배되면서부터이다. 입도入島 후에는 조천읍 함덕리에 정착하여 후진 교육에 기여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2) 위키백과 신천강씨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천信川
 


 

태봉泰封국 궁예弓裔의 강비康妃
『삼국사기』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는 태봉泰封국을 세운 궁예弓裔의 왕비로 강씨가 있었다는 것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녀는 강연창康衍昌의 딸이며, 할아버지 강만루康萬嶁는 신라 말 대장군을 지냈다. 그녀의 친정은 신천의 유력 호족 가문으로, 강장자 가문이라 불렸다. 후에 고려를 건국하는 태조 왕건은 그의 집안의 인척이었다. 그녀의 선조들은 개성에서 신천으로 옮겨 살았다. 후에 궁예가 신천 출신인 그녀를 왕비로 맞이한 것은 황해도, 평안도 일대인 패서浿西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강비康妃는 궁예와 결혼하여 아들 신광, 청광을 두었다. 그러나 남편 궁예로부터 간통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두 아들과 함께 죽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한편 철원 지역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강비는 원래 친정 종고조부의 외손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과 혼인이 약속되었지만,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한다. 이 지역에서는 강비가 궁예를 향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다가 발각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와 달리 경기도 가평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강비가 폭군이 된 궁예에게 성군이 될 것을 간언하다가 궁예의 노여움을 사서 가평에 유배되었다는 이야기다. 즉 강비는 궁예에 의해 잔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궁예에게 도전한 죄로 유배를 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후에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게 되자 궁예는 가평으로 와서 강비를 찾았지만 이미 그녀는 죽은 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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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씨연맹
‘강’으로 발음되는 성씨들
강씨强氏
강씨强氏는 중국 진晋의 대부 강일强釰을 시조로 한다. 1924년에 간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강일의 후손으로 송나라 희종 때 전당을 지낸 강준명强浚明을 우리나라 충주 강씨忠州强氏의 시조로 하고 있다. 역사 기록에서는 무열왕~문무왕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강수强首가 나타나고 그가 석체昔諦의 아들인 것을 보면 석씨였을 가능성이 높다. 충주 강씨가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된 경위와 충주 거주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강씨江氏
강씨江氏는 중국의 성씨이다. 강江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34명으로 조사되었다.

진주 강씨晋州疆氏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경남 통영군 광도면 우동리牛洞里에 강선악彊善岳 1가구가 살고 있다고 나타난 성씨인데, 관향을 진주晋州로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관을 쓰게 된 연유나 내력을 알 수 없다.

강씨剛氏
우리나라 강씨剛氏의 연원은 중국 청나라 덕종 때 사람인 강의자剛毅字의 아들 강량剛良의 후손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강씨는 괴산 강씨와 장연 강씨 2본으로 전한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그는 만주인으로 공부상서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1930년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서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강응룡剛應龍의 1가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자료에 의하면 1908년 민적부民籍簿에 기재할 때 강强을 강剛으로 잘못 적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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