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姓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문화 류씨는 모두 87186가구에 총 28만 40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성씨별 인구 순위가 나주 임씨에 이어 29위이다.
우리나라의 류씨
문화 류씨 시조 류차달
「문화류씨통사」에 의하면 문화 류씨가 국사國史나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처음 등재된 것은 ‘고려사高麗史’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의 주註에 “공의 6세조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의 개국을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관직은 대승大丞이었다.”고 하였다. 대승은 고려 초기의 관계로 고려의 제도가 정비되기 전에 문, 무관에게 수여되었으며, 고려 16관계 중 5위에 해당하였고 서기 995년 문, 무의 관계를 나눌 때 흥록대부興祿大夫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 호칭은 향직 3품으로 존속, 비관인층과 지방 호족들에게 수여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문화현의 인물편에 “류차달은 고려 태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고려 태조가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으며 배위配位 김씨는 경주김씨(신라 김씨) 도시조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김균의 딸로 아들인 좌윤佐尹 효금孝金을 두었다. 류차달의 아들인 좌윤 효금이 구월산九月山을 유람하다가 호랑이를 만나 입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줘 그 음덕으로 자손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고 산신이 현몽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좌윤공의 5세손 문간공 류공권 이하 수대數代의 사행事行이 기록되어 있다.
류씨는 2000년 기준으로 남한에 60만여 명, 56개의 본이 존재한다. 이중 문화 류씨가 28만여 명으로 대종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으로 전주, 진주, 고흥, 강릉, 서산, 풍산이 10,000명이 넘는 본이다. 전에는 모든 류씨는 문화류씨의 분파로 믿어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본에 따라 경우가 다르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또 한동안 류씨와 차씨가 뿌리가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현재 문화 류씨 측에서는 이를 위서僞書에 근거를 둔 잘못된 사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관향 문화文化의 역사
문화文化는 황해도에 있는 지명으로 서울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신천군과 삼천군에 걸친 일대인데, 그 지역은 고구려 때 궐구현闕口縣, 고려초에 유주儒州 등의 명칭 변경이 있다가, 고려 고종 때 문화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문화현으로 존속시켜 오다가 1895년(고종 32년)에 군郡으로 되었고, 그 이후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1952년에는 삼천군이 신설되면서 절반 정도가 삼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초에 유주로서 주州로 승격된 것이 류차달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류경柳璥은 고려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이듬해 나라에서는 유주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황해도 구월산(953m) 정상에서 동남쪽 40리 평지에 문화현이 있었다. 구월산은 북한의 5대 명산 중 하나이고 황해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구월산 남쪽 산록에 대승공 류차달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류릉柳陵으로 불리며 전에는 절이었다가 재실齋室로 변한 묵방재라는 건물이 묘소의 아래에 있다고 한다.
성씨의 변천과정
고려 시대의 인물
문화 류씨의 분파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활약한 인물들인 류차달의 11세, 13세, 14세손을 파조로 하여 15개 파로 나누어진다. 7세손 류공권柳公權에게는 류언침柳彥沉, 류택柳澤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을 각각 갑甲파, 을乙파라 한다.
문간공 류공권은 의종 14년 등과 후 명종 때에 추밀원사, 정당문학을 지냈으며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명신이다. 큰 아들 류언침은 예부상서판각문사, 둘째 아들 류택은 좌복사左僕射를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承旨를 지냈다. 류경柳璥은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고, 고려가 원에 항복하여 그 지배를 받게 된 고종, 원종조에 걸친 시기에 활동한 재상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에 올랐다. 당시는 최씨 무인정권기로서 최의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1258년 류경은 김준 등과 협력,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돌렸다. 이 공으로 상장군에 올랐으며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역임했다. 1270년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에서 반란군에게 잡혔으나 극적으로 탈출했다. 평장사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 첨의시랑찬성僉議侍郞贊成, 첨의중찬僉議中贊 등을 역임했다. 문장이 뛰어나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등 4대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존비, 안향 등 많은 학자가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류승柳陞은 류경의 아들로 충렬왕 17년 고려에 침입해 온 합단적哈丹賊을 격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뒤에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이르렀다. 통례문通禮門에 오래 종사하면서 조정의 의례에 자세한 해설을 붙인 ‘신의新儀’를 편찬했다.
류만수柳曼殊, 류관柳寬, 류량柳亮은 고려 말에 관직에 나아갔는데, 역성 혁명기에 조선 개국 세력에 협력하여 개국공신이 되고, 재상에까지 올라 조선조에서 문화 류씨의 기반을 확고히 한 인물들이다. 류만수는 공민왕 때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가 되고,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우 왕조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다. 우왕 14년 요동정벌군 장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 그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 공양왕 2년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가 되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겸했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다음해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승진했다. 태조 7년 이성계의 계승자를 둘러싸고 왕자들 간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 측에 의해 정도전 등과 함께 참살되었다.
유관은 공민왕 20년 문과에 급제, 이성계의 개국에 협조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대사성大司成, 형조刑曹, 이조전서吏曹典書를 지내고, 태종 초에 대사헌大司憲,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역임했다. 1409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 다음해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21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424년 우의정에 승진하여 ‘고려사’를 수정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했다. 울타리도 없는 초가에 살면서 비가 새자 우산을 받고 앉아 우산없는 사람을 걱정했다는 일화가 청백리의 귀감으로 전해온다. 그의 아들이 태종 조에 형조판서를 지낸 류계문柳季聞이다.
류형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다. 1392년 이조전서로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지고, 정종 2년 참지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로, 다음해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문성군에 봉해졌다. 예문관대제학,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겸 대사헌을 역임하고, 1413년 부원군에 진봉進封, 1415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의 인물
류양의 5대손인 충숙공 류권柳權은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인종이 승하한 후에는 원상으로 서정庶政을 맡았으나, 명종 즉위 후 외척인 파평 윤씨 진영에서 벌어진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정권쟁탈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하는데, 이때 이조판서 류인숙(보주류씨), 대사간 류감(전주류씨), 이조참판 류희춘(선산류씨), 대사간 류경심(풍산류씨) 등도 파직당하고, 유배 받는 등 류씨 집안에 큰 화가 미쳤다.
임진왜란 때는 충경공의 부윤공파인 문흥군 류사원柳思瑗이 청병을 위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좌상공파의 파조 류만수의 손자에서는 단종 때 청난공신인 류숙柳淑(판서), 류수柳洙(찬성), 류사柳泗(판서) 등 3명의 공신이 나왔으며, 현손인 문희공 류순柳洵은 세조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내다가 중종반정 이후 공신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류순의 아들인 류응룡柳應龍은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또 6대손인 문정공 류전柳琠은 명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호당을 거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후에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시녕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그외 안양공 류수柳洙는 성종 때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문성군에 봉해졌다. 류만수의 사촌이면서 정숙공파조인 류연현柳延顯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하정공파의 파조인 문간공 류관의 둘째 아들 류계문柳季聞은 세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류계문의 손자 류담년柳聃年도 중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실학자이며 토지개혁과 경제혁신을 주장한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인 류형원은 류계문의 8대손이다. 그의 9대손인 충간공 류상운柳尙運은 숙종 때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고, 대사간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두 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세 번 역임하였다. 하지만 장희빈 폐위에 얽힌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직되었다. 그의 아들 만암 류봉휘柳鳳輝는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였는데, 소론 측의 입장에서 영조의 책봉을 반대하여, 노론을 실각시켰으나, 사화를 일으킨 주모자로 노론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에서 면직되고, 경흥에 유배되어 죽었다.
그 외 기후사공파에서는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충경공 류성원柳誠源,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이 있다. 이외에도 박연과 함께 아악의 기초를 세운 문숙공 류사눌柳思訥, 임진왜란 때 공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류팽노柳彭老, 정조 때 기정진 등과 함께 이름난 유학자인 류대원柳大遠 등이 있다. 문화류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니, 134인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음사蔭仕를 포함 실직당상관이 90여 인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상신相臣 9인, 호당湖堂 5인, 청백리淸白吏 4인, 공신功臣 11인 등이 배출되었다. 시호諡號는 22장이 내렸는데, 그 중에 문시文諡는 7장이다.
문화 류씨 근현대 인물
문화 류씨 중에서 일제 침략의 민족 항재기의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류상렬과 류동설이 있다. 류상렬은 3.1운동 때 황해도 평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주재소를 습격한 후 만주로 망명, 대한독립단 조맹선의 명령을 받고 입국해 수비단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1922년 서흥에서 사형을 당해 순국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류동설은 일본육사를 졸업, 구한국군 참령으로 있다가 1907년 군대가 해산된 후 안창호를 중심으로 이상재, 윤치호, 양기택 등과 함께 신민회 조직에 참여, 자주독립운동과 계몽활동에 힘썼다. 1909년 안중근의 이등박문 살해사건 이후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1911년 1052인 사건과 관련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풀려나 만주로 망명했다. 1917년 쌍성에서 전립, 문창범, 전이 등과 전로한족회를 결성했다. 이듬해 서일이 조직한 중광단에 입단,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등과 독립선언서를 작성, 이에 서명했다.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참모총장을 지내고 한때 공산주의로 전향, 1921년 일크츠에서 열린 고려 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35년 중국 남경에서 김규식, 지청천, 신익희 등과 민족혁명단을 조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했다. 해방 후 귀국 초대 통위부장이 되어 국군창설에 큰 역할을 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현대 인물로는 1960∼70년대 야당의 거목이었던 류진산 전 신민당 총재를 비롯하여, 류인곤, 류광열, 류지원, 류창열, 류한열, 류인범, 류재희, 류경현, 류제연(이상 국회의원), 류기춘(문교부장관), 류병현(주미대사), 류양수(교통부장관), 류흥수(치안본부장, 현 경찰청장), 류태현(광주고법 부장판사), 류길선(춘천지검장)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농학계의 류달영씨를 비롯하여, 류홍열(서울대 문리대교수), 류형진(대한교육연합회장), 류태영(건국대교수), 류경채(서울대교수)씨 등이 있다.
재계에서는 류제국(경기은행장), 류호욱(미진산업㈜사장), 류용갑(페리관광호텔사장), 류용곤(타워호텔사장)씨 등이 있다(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됐음).
전국의 문화 류씨 대평군파 집성촌인 보은군 산외면 신개울 마을은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創氏改名과 관련하여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창씨개명이 시작된 1940년 이 마을 주민 119명은 어른은 물론 아이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보복은 가혹했다. 문화 류씨 족보를 찍었던 목판은 불태워졌고 마을 비석도 철거됐다. 어디론가 행방불명된 사람이 수두룩하고 의문사한 주민도 비일비재했다. 현재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 중에 생존해 있는 사람은 류흥렬씨다. 류씨는 이렇게 희생된 마을 주민들을 위해 자비를 들여 신개울유래비를 제작해 마을 입구에 세웠다고 한다.
‘柳車同原說’에 대한 류문의 공식입장
오랫동안 류씨와 차씨가 동조이성同祖異姓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 차류 동원설의 주요 근거가 된 책이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라는 책이다. 책 내용에는 차원부의 선대세계가 기자시대까지 소급, 기재되어 있다. 황제헌원의 후손 신갑辛甲이라는 사람이 기자조선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평양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서 은거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때 성을 일토一土를 따서 왕王씨로 변성하였다. 그의 25세손 수긍受兢은 기자조선 말엽에 사사士師(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직)를 맡아 예악과 문물의 의관법도를 제정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수긍의 34세손 왕몽王蒙 때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 재위 시였는데 기준이 왕씨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자 아들 8형제 중 일곱 번 째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피신하여 살았다. 그때 성을 왕자의 변형인 전田, 신申으로 고쳤다가 다시 차車로 고치고 자신의 이름을 무일無一, 아들 왕림은 신을神乙로 고쳤다고 한다. 그후 무일의 33세손 승색承穡이 신라 애장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 공숙恭叔과 헌강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황해도 구월산 아래 묵방동에 은신하였다. 승색은 조모의 성씨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류柳로 고치고 이름을 색穡, 아들을 숙叔으로 개명하였다. 류색柳穡의 6세손이 류해柳海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류해는 사재를 털어 수레 1천량을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나중에 고려 태조는 류해에게 이차위달以車爲達의 뜻으로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차달의 장자 효전孝全에게 차車씨 성을, 차자 효금孝金에게 류씨 성을 계승하게 하였다. 하지만 류씨 문중에서는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에 오류가 맞아 책 자체에 신빙성이 없고 문화 류씨의 가장 오래된 족보 가정보(1562년, 임술년)에 유차달의 아들이 류효금 하나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류차 동조이성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 류씨 종친회 측에서는 2007년 차씨(연안 차씨)와 류씨들의 공동 대종회 성격의 단체였던 ‘차류대종회’를 파기하였고 2008년 문화류씨 대동보(전체 족보)인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가 발간되어 류씨와 차씨는 관계가 없음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문화류씨 가정보
‘가정보嘉靖譜’는 1562년(조선 명종 17년, 명나라 가정 41년)에 만들어진 문화 류씨의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완벽한 체계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외손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후에 여러 문중의 족보를 만드는데 참고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에 편찬된 문화 류씨 ‘영락보永樂譜’인데, 아쉽게도 현재 서문만 남아있다. 그 후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1477년 성종 7년, 3권 364 페이지)와 문화류씨 ‘가정보’(1562년 명종 17, 10권 2204 페이지)가 나왔는데 현존한다. 이 두 족보는 내외손內外孫을 차별 없이 동격同格으로 취급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위의 경우 성명만 쓰고 본관이나 선조의 기록은 일체 쓰지 않은 반면 그 자손(외손 및 외외손)은 6~7대까지 자세히 적고 있어 핏줄을 중시하고 있다. ‘가정보’의 경우 4만 2천명이 등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양자養子 기록이 나오고 서자庶子의 기록은 없으며, 개가한 여자의 남편을 전부前夫와 후부後夫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록의 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종에서 중종에 이르기까지 75년간 나라에서 89회의 문과文科 과거시험이 실시되어 1,595명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중 1,120명의 이름이 가정보에 올라 있으며 거의 대부분인 1,071명이 문화류씨와 혼인관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 급제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놀라운 수치이다.
운조루雲鳥樓의 타인능해他人能解
전남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에는 문화류씨 10대 종가인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낙안군수 류이주柳爾冑 선생(류차달의 31세손)이 지은 99칸짜리 양반 가옥이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인데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왔다고 한다. 운조루가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곡절을 수없이 겪어야 했던 지리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230년이 넘은 가옥 60여 칸이 원형을 지키며 보존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둘째는 쌀이 3가마나 들어가는 쌀 뒤주 때문이다. 200여 년 된 원통형 뒤주 아래 부분의 마개에는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있다. 즉 운조루의 주인은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를 열어서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운조루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됐다고 전해진다. 동네에서 배를 곯는 사람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6.25 때 빨치산들이 뭣 모르고 운조루를 불태우려고 하면, 이 동네 머슴 출신의 좌익들이 이를 말렸다고 한다. “다른 집은 다 태워도 저 집은 태우면 안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다. 현재는 류이주의 10세손 류홍수柳鴻洙 옹이 관리하고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충청매일, 2004년 3월 1일자
〈참고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