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우리나라의 주周씨는 통일신라 시대에 동래하였다는 상주尙州・철원鐵原・초계草溪 등 3대 계통이 있다. ‘상주 주씨 연원보尙州周氏淵源譜’에 보면 상주 주씨는 신라 원성왕 2년 당나라 덕종의 사신 중 부사副使로 온 뒤 병부령兵部令과 상주총관尙州摠管을 지낸 주이周頤를 시조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조 주이周頤는 당唐나라 덕종 때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내고, 786년(원성왕 2년)에 부사副使가 되어 신라에 왔다가 귀화하여 시위부대감侍衛府大監, 병부령兵部令, 상주총관尙州摠管을 역임하고, 이를 인연으로 후손들이 상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철원 주씨鐵原周氏는 주이의 조부 주승광周承光을 시조로 하며, 또 초계 주씨草溪周氏는 당말에 발생한 오계五季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왔다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주황周璜을 시조로 한다고 하였다.
그 밖에 안의安義⋅삼계森溪 등 주씨의 여러 분파가 있지만 「도곡총설陶谷叢說」 등의 기록에 의하면 모두 같은 뿌리라고 한다. 그러나 「상주주씨의계록尙州周氏疑系錄」에 적힌 바와 같이, 상계上系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이 있는 등 의견이 달라 대동보大同譜를 간행하지 않고 있다.
주씨 집안은 대대로 숱한 인걸들을 배출, 역사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 신라 헌덕왕 9년 당唐에 건너가 한림학사가 되어 귀국한 뒤 희강왕 때 예부경禮部卿을 지낸 주황周璜은 주씨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고려조에는 주세봉周世封(지주사知奏事), 주원周源(한림학사翰林學士), 주연周演(병부시랑兵部侍郎), 주굉周宏(大提學), 주직周稷(도첨의시랑都僉議侍郞), 주영규周永珪(이부상서吏部尙書), 주정신周正臣(찬성사贊成事), 주겸周謙1(전공판서典工判書) 등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경남 산청의 배양培養 마을에 은거한 주세후周世侯(예부상서禮部尙書)와 주경周璟(이부상서吏部尙書・대제학大提學) 부자는 충절을 지킨 신하로 유명하다. 주세후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상서禮部尙書, 좌복야左僕射의 벼슬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선정돼 조정과 백성의 사표가 되었다. 그가 고향에서 죽자 크게 슬퍼하여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인 배양제공培養齊公 주경周璟은 고려조의 대표적인 효자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상喪을 지냈으며,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 지금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 마을엔 그의 효자비가 서 있다.
고려말 야은冶隱 길재吉再,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등과 함께 세칭 포파삼절사逋播三節使로 불리는 도은공陶隱公 주유周瑜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합천陜川 초계현草溪縣으로 낙향, 은거했다. 그는 고매한 인품과 학식・문장을 고루 갖춘 거유로 세상 사람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이성계가 조선조를 세운 뒤 그의 인물됨을 아껴 등용하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합천 문림리 대암산 기슭에서 후학을 기르는 데 여생을 바쳤다.
조선 선조 때 인물인 주이周怡(예안현감禮安縣監)는 시문에 뛰어나고 학덕이 높아 널리 추앙된 인물이다. 홍문관교리 시절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가 명明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즉석 분송시盆松詩로 “반척사분반척송半尺沙盆半尺松 풍상고절노용종風霜孤節老龍鍾 지거부학우천장知渠不學于天長 험득인간직불용驗得人間直不容(작은 모래 화분에서 자란 작은 소나무 / 풍상 만나 뜻 얻지 못하고 외로이 늙었구나 / 나는 아노라 저 소나무 하늘 높이 자라지 않았음을 / 세속 인간들이 곧음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체험이 있음을)”이란 시를 지어 올렸다. 명황제 세종은 그의 시재에 탄복하여 ‘직불용선생直不容先生’이란 별호를 내렸다. 그의 문집과 시 수십 편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주재성周宰成은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난 때 창의, 진압한 공으로 조정에서 입사入仕를 종용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 삼공(정승)의 벼슬을 준들 어찌 이 강산과 바꾸랴”라는 뜻으로 자신의 서재를 하환정何換亭이라 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용학강의庸學講義」, 「경의집록經義輯錄」, 「거가요범居家要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죽은 후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이 내려졌다.
그의 아들 주도복周道復도 이인좌 등의 난 때 창의, 큰 공을 세우고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孝子旌門(아버지와 함께 충신・효자 쌍정문雙旌門)과 복호復戶(조세와 노역을 면제받음)가 내려졌다. 지금도 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연당 입구에 붉은색의 쌍정문이 남아 있어 이들의 충효 정신을 말해 주고 있다.
근세의 큰 인물로는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있다. 우리 글의 맞춤법을 통일하여 한글 과학화의 문을 연 주시경은 국운이 기울어 가던 구한말 이 땅에 태어나서 “나라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며 일제의 압제에 항거,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선 선각자였다. 우리글을 가르쳐 문맹을 없애고 민족의 자주정신을 일깨우려는 문자 보급 운동은 선각자들이 사명감을 지니고 추진한 것으로 민족 독립운동의 원천이기도 했다.
배재학당에서 수학한 주시경이 본격적인 한글 연구 및 보급 운동을 편 것은 1907년 남대문 상동 공옥학교에 하기 국어 강습소를 개설하면서부터이다. 이곳 졸업생들은 주시경과 함께 1908년 국어 연구학회를 창립했는데, 이 모임이 바로 조선 언문회 → 조선어 연구회 → 조선어 학회로 이어져 오늘날 한글학회의 모태가 되었다. 그가 1911년 보성중학에 개설한 일요 조선어 강습원으로부터 최현배, 이병기, 김윤경, 장지영, 변영태, 현상윤 등 뒷날 국어국문학계 및 문화계를 이끈 큰 인물들이 배출됐다. 주시경은 이렇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조선어문법』, 『국어문전음악』, 『월남망국사』, 『말의 소리』 등의 저서를 잇달아 출간했다.
많은 학자들이 “주시경 선생의 문법 이론은 현대의 첨단 언어학 이론인 기호학과 변형・생성 문법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현대식 맞춤법을 거의 완성시켰다.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 편찬}}에 착수, 완성을 보지 못하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모이』의 초고는 해방 후 한글학회가 『우리말 큰사전』을 완성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한글의 시조라면 주시경은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중시조中始祖”라는 것이 한글학자들의 평이다.
주영복周永福(1927~2005)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 행정관료이다. 1949년 대한민국 공군사관후보생 8기로서 공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1950년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집 2기가 되어 공군 중위로 재임관하였다. 1959년 단국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63년 국방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공군본부 감찰감, 공군사관학교 교장, 공군 군수사령관, 공군참모차장, 공군 작전사령관, 공군참모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고 1979년 4월 전역했다. 그는 대한민국 최장수 공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였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뒤 국방부 장관이 되어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관여했으며, 1982년 국방부 장관에서 물러난 후에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97년 4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내란⋅반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됐다.
주선회周善會(1946~현재) - 대한민국 헌법재판관, 헌법재판소장 권한 대행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1969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제10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0년에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을 졸업하고 육군법무관으로 병역을 마친 다음, 대구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대구지검 경주지청 검사, 부산지검 검사, 법무부 법무과 검사, 서울지검 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미국 하버드 로스쿨 법학석사(LLM) 학위를 취득하고, 법무연수원 연구관, 마산지검 부장검사, 청주지검 검사장, 울산지검 검사장, 광주고검 검사장, 법무연수원장 등 검찰직을 두루 거친 뒤, 2007년까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