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우리나라의 기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기이할 기奇 자를 쓰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27,379명, 기타 기씨 1,450명으로 총 28,829명이다. 기타 기씨로는 키 기箕 자를 쓰는 행주 기씨幸州箕氏가 있다.
시조는 기우성奇友誠으로, 백제 온조왕 때 시중을 지내고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행주에 세거하며 행주幸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온조왕溫祚王 기록에는 기奇씨의 선조인 마한의 유민遺民이 온조왕에 의하여 한산漢山(서울)의 북쪽, 행주幸州로 옮겨진 기록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안에는 기씨의 조상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기가奇哥 바위와 이곳에 살면서 달고 맛있게 마셨다는 기감천奇甘泉이 있다.
기씨 가문에서 1세로 치는 이는 우성의 66세손인 기순우奇純祐다. 기씨는 행주 단일본이다. 그리고 3천여 년의 긴 역사를 내세우는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다. 행주 기씨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연 중국 은나라의 기자箕子를 선조계라고 밝히고 있다.
기자는 원래 중국 은殷나라 주왕의 태사였는데,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수천의 사람들과 함께 동쪽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의 41세손 기준箕準은 연燕나라 위만의 배신으로 남쪽으로 이주하여 전북 금마현金馬縣(현재 익산)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7세손 기훈箕勳(원왕)에 이르러 3형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은 덕양(행주) 기씨德陽(幸州)箕氏, 우량友諒은 상당(청주) 한씨上黨(淸州)韓氏, 우평友平은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의 시조가 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 성씨는 한 핏줄, 종씨宗氏라 여겨 지금까지도 통혼을 하지 않는다. 행주 기씨가 선대를 제쳐 놓고 기순우奇純祐를 1세로 치는 이유는 한때 선대의 족보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의 동생 기윤헌奇允獻의 집에 고세계본古世系本을 보관하고 있다가 재화災禍를 당해 피난하는 바람에 잃고, 그 직후에 만든 세보에는 중간 조상이 실전失傳된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없어져 버린 것으로 알았던 고세계본이 기윤헌의 둘째 아들인 정의挺懿의 집에서 뒤늦게 발견돼 실전됐던 66세대의 행적을 소상히 알게 됐다는 것이다. 기씨 세계의 시조인 기순우는 기문유奇文儒의 아들로 고려 인종 때 문하평장사 벼슬을 했으며 그의 아들인 수전守全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사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師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
행주 기씨가 가문을 단단히 하고 크게 융성을 누린 것은 고려 중엽 이후 약 2백여 년간, 순우의 손자 가운데 윤위允偉⋅윤숙允肅⋅필선弼善⋅필준弼俊이 상장군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는 등 무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으며, 탁성卓誠은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였다. 윤숙의 아들인 홍수洪壽와 홍영洪穎은 최충헌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기씨 문중은 기황후奇皇后가 등장하면서 그 영화가 절정에 달했다.
기황후는 홍영의 손자 자오子敖의 막내딸로 16세 때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녀로 들어가 22세 때 태자를 낳고 제2황후로 책봉됐다. 기황후는 공녀 제도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 지방의 성으로 만들려던 논의를 무마시켜, 부마국으로 고려의 이름과 국가를 보존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가 낳은 태자는 후일의 소제昭帝로 원의 황통을 이었다. 이로 인해 기씨 일문은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세도가가 됐다.
그러나 원이 쇠퇴하고 고려에선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면서 기씨 일문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는다. 공민왕은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를 일으키면서 원으로부터 영토를 수복하는 기회를 잡아 1백 년에 걸친 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이 원⋅명 교체기에 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기씨 일문은 수난을 당했다. 친원 외척으로 지목된 기씨 일가는 제거 대상이 되고, 드디어 기황후의 오빠로 권력의 정상에 있던 기철奇轍이 1356년(공민왕 5년) 숙청됨으로써 기씨의 영화는 막을 내렸다.
여말麗末에 수난을 겪은 기씨 문중을 다시 살려서 명문으로 복구시킨 중흥조는 기건奇虔(1390~1460)이다. 서울의 청파동은 그의 처음 호인 청파에서 유래한다. 조선 세종 때에 그는 초야에 묻힌 선비였으나, 왕은 그의 학덕을 듣고 발탁해 지평持平에 임명했다. 그 후 제주목사⋅전라도관찰사⋅대사헌⋅한성부윤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세조 원년에 은퇴했다.
그는 단종 재위 시 수양대군이 궁중에 무상출입하며 정치에 간여하자 정사를 어지럽히는 일이니 종실의 궁내 출입을 통제해야 한다는 상소(금분경안禁奔競案)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수양이 등극하여 세조가 되자 그의 인품과 명망을 아껴 다섯 차례나 그에게 벼슬을 권했으나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로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정말 눈이 멀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바늘로 그의 눈을 찌르는 체했으며, 그래도 끝내 꼼짝하지 않자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는 해녀들이 힘들여 전복을 채취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고, 당시에 제주도 사람들은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를 교화시켜 장례법을 처음으로 시행케 하였다. 기씨 문중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성사리에 있는 기건의 묘소 일대를 기씨 도선산都先山이라 하여 유적지로 삼고 이곳에 추모 제단을 세워 양력 11월 10일에 제사를 올린다.
건은 아들 축軸과 손자 5형제(유裕⋅찬襸⋅저褚⋅주裯⋅정禎)를 두었고, 이 가운데 찬襸이 다시 형逈⋅원遠⋅괄适⋅진進⋅준遵 등 5형제를 두었다. 이 중에 기준奇遵(호: 복재服齎)은 기묘사화己卯士禍(1519)에 화를 입은 팔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정암 조광조와 종유從遊하여 중종 9년 대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뽑히고 조광조와 함께 도덕 정치를 구현하려다 훈구파에 몰려 아산⋅온성에 유배됐다가 중종 16년 사사되었다. 30대에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덕양유고德陽遺稿」와 「무인기문戊寅記聞」을 남겼다.
고려 말 멸문을 피해 흩어졌던 기씨들은 이 무렵 기묘사화를 피해 또다시 멀리 남도로 내려가 그 후엔 전라도 일대가 기문의 본고장이 되어 버렸다. 이 시대에 기씨의 명성을 천하에 떨친 사람은 기대승奇大升이다. 기건의 현손인 대승은 자가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시호는 문헌文憲이고 광국훈光國勳으로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퇴계 이황과의 8년에 걸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서신 논쟁은 조선조 학술사의 빛나는 한 대목이며, 퇴계는 고봉의 탁견을 상당 부분 수용하기도 했다. 「논사록論思錄」, 「주자록朱子錄」, 「주자문록朱子文錄」, 「퇴계왕복서한집退溪往復書翰集」, 「시문집詩文集」 등 11권의 저서를 남겼다.
고봉 기대승을 배출하여 조선조 성리학의 한 맥을 형성한 기문은 조선조 말기 다시 거유 기정진奇正鎭을 냈다. 기정진의 호는 노사蘆沙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전래의 정주학설인 주기설主氣說을 반대하여 주리설主理說을 주창한 그는 서경덕, 이황, 이이, 이진상, 임성주 등과 더불어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로 불린다. 그가 죽자 면암 최익현이 그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답문유취」 6권과 「문집」 15권의 저술이 있으며 전남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됐다.
한말의 유명한 의병장 기삼연奇參衍(호: 성재省齎)은 을미년 민비 피화被禍 때 기우만과 같이 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이 서울로 진격하던 해 충남 여산에 이르러 조정에서 보낸 전유사 신기선申箕善 일행을 만났다.
임금의 이름으로 의병 해산을 권하는 신기선의 설득에 의병장들이 따르려 들자 성재는 “이는 왕명을 가장한 친일 분자들의 간계奸計”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림과는 국사를 논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재기를 다짐했다.
기삼연은 1907년 장성長成 수연산隨緣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호남의병총대장이 되어 일본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우다가 1908년 1월 체포되어 광주光州 서천교西川橋 백사장에서 처형됐다. 정부는 198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그에게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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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