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씨의 본관은 주종인 개성·강릉·해주 외에도 15본이 전해지고 있다. 그 밖에도 명나라에서 귀화한 제남濟南 왕씨王氏가 있다. 강릉江陵 왕씨王氏는 문헌에 시조 왕유王裕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상은 왕건의 열다섯째 아들 동양군東陽君 왕원王垣의 아들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번 호에서는 고려의 왕성王姓, 개성 왕씨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시조와 유래
개성 왕씨의 시조는 고려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된 왕건의 증조부 왕보육王寶育이다. 왕건의 집안은 본래 송악松岳(개성)의 호족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그 가계에 대한 자세한 내역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사高麗史」
를 보면 태조 재위 2년에 왕건王建의 3대 조상을 대왕으로 추봉追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辛巳 追謚三代, 以曾祖考爲始祖元德大王, 妃爲貞和王后, 祖考爲懿祖景康大王, 妃爲元昌王后, 考爲世祖威武大王, 妃爲威肅王后.
신사년, 3대의 시호를 추존하여 증조부를 원덕대왕이라 하고 비를 정화왕후라고 하였으며, 조부를 의조경강대왕이라 하고 비를 원창왕후라고 하였으며, 부친을 세조위무대왕이라 하고 비를 위숙왕후라 하였다. (고려사)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태조의 조상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고려 정종 때의 문신인 황주량黃周亮이 편찬한 「태조실록太祖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왕건의 아버지의 이름은 왕륭王隆(龍建이라고도 함)이고, 어머니의 성은 한韓씨라고 한다.
고려사에 기록된 건국 신화
「고려사高麗史」는 본문과 별도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과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을 인용해 왕실의 세계世系를 기록해 놓았다. 책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이전 5대까지의 행적을 상세히 서술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대조 호경虎景은 활을 잘 쏘았고,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칭하며, 백두산으로부터 유람하여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다. 하루는 사냥하러 갔다가 날이 저물어 바위 굴에서 밤을 새우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 동행하였던 열 사람이 합의하기를, 관을 던져 호랑이가 무는 관의 임자를 호랑이에게 내주기로 하였다. 호랑이가 호경의 관을 물어 호경이 굴에서 나오자, 바위 굴이 무너져 그 속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호랑이는 그냥 사라졌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 지내면서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산신이 나타나 호경에게 자신은 과부이니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神政을 펴자고 하고는 호경과 함께 숨어 버렸다. 그 고장 사람들은 호경을 대왕이라고 하면서 산신과 함께 받들었다. 호경은 예전 아내를 찾아가 관계를 맺어 강충康忠을 낳았다. 5대조 강충은 후손 중에 삼한을 통합할 인물이 나오리라는 풍수의 말에 따라 송악松嶽에 소나무를 심었다. 4대조 보육寶育은 지리산에서 도를 닦았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오줌을 누었더니 삼한이 온통 바다가 되는 꿈이었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보육의 형이 자신의 딸인 덕주德周를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그 사이에 두 딸이 출생하였다. 큰딸이 또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천하가 잠기는 꿈을 꾸었는데, 작은딸 진의辰義가 그 꿈을 샀다. 진의는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의 귀성貴姓(명문세족, 나중에 당나라 숙종이 됨)이라는 귀인貴人과 동침하여 작제건作帝建을 낳았다. 왕건의 2대조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다. 16세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데, 어느 곳에 이르자 배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뱃사람들이 점을 치더니 고려 사람을 내리게 해야 한다고 하여 작제건이 바다에 남게 되었다. 그때 서해 용왕이 늙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부처로 변신하여 괴롭히는 여우를 물리쳐 달라고 하였다. 작제건은 활을 쏘아 그 여우를 퇴치하였고 그 보답으로 여러 가지 보물을 얻었으며,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 작제건과 아내 용녀는 용궁에서 얻어 온 돼지를 따라가 집터를 잡고 살다가, 용녀가 용궁으로 가는 장면을 작제건이 엿보는 바람에 용녀는 용이 되어 영영 가 버리고 말았다. 작제건과 용녀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장남인 용건龍建은 길을 가다가 꿈에서 배필이 되기로 약속하였던 미인을 만나 드디어 혼인하였다. 도선道詵이라는 풍수가 예언한 대로 과연 왕건이 출생하여 삼한의 주인이 되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기서 작제건의 아버지가 당나라 숙종이라는 부분은 어폐語弊가 있다. 그 부분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수긍이 어려웠다. 그 내용이 「고려사」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다음과 같다.
고려 26대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당의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왕의 선조께서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던데 어디에 근거한 바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대궐 문을 나오지 않았고 안록산의 난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때에 동쪽으로 와서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답하지 못하였는데 민지閔漬가 곁에 있으면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였을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입니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당 선종 역시 생전에 장안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당 황실 후예설은 신빙성이 낮다. 아마도 불분명한 혈통을 당 황실과 연결시키려는 후대 사대주의의 발로이리라.
1) 조선 전기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고려 왕조의 역사를 저술한 역사서이다. 기전체紀傳體로 된 고려 왕조의 정사正史이다.
2) 고려 의종(1146~1170) 때 김관의가 여러 사람이 사장私藏하고 있던 기록들을 모아서 편찬한 고려 시대의 역사책이다. 현전現傳하지 않지만 왕건의 혈통에 관한 설화 내용이 「고려사」에 인용되어 전하고 있다.
3) 고려 후기 문신 민지가 1317년(충숙왕 4년) 고려 왕조에 관하여 저술한 역사서이다. 원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인데 줄여서 ‘편년강목編年綱目’이라고도 한다. 모두 42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익제 이제현의 비판
여기서 보육은 시조 즉 국조원덕대왕으로, 작제건은 의조경강대왕으로, 용건은 세조위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 고려 25대 충렬왕 때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만일 김관의의 말대로 한다면 당나라 귀성貴姓이라는 자는 의조에게 아버지요, 보육은 의조 아버지의 장인丈人이 되는데(당나라 숙종이 보육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는 데서 나온 말) 보육을 국조國祖(‘왕조의 시조’라는 뜻)라고 칭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김관의는 또 말하기를 태조가 3대의 조상들을 추존하였는데 아버지 세조를 위무대왕으로 어머니를 위숙왕후로 증조모를 정화왕후로 증조모의 아버지인 보육을 국조원덕대왕으로 각각 추존하였다고 했다. 그의 이런 말은 추존에서 증조부를 생략하고 증조모의 아버지를 써넣어서 합하여 3대 조상들이라고 한 것인데 이것 또한 무슨 까닭인가?”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
그의 말은 혈통으로 볼 때 의조의 아버지(당나라 귀성)를 생략하고 의조의 외할아버지를 국조로 모시는 것이 이상하다는 의미이다. 또 태조의 3대 조상을 추존할 때도 아버지, 할아버지 다음에 증조부를 건너뛰어 4대에 해당하는 증조모의 아버지(왕보윤)를 추존한 것이 이상하다는 의미이다.
왕건의 조부인 의조의 친가가 미궁에 빠져 있다. 친가 쪽으로 올라가던 가계가 의조로부터 외가로 방향을 틀어 버린다. 이런 경우는 혼외 자식(사생아)인 경우에 많이 발생한다. 의조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자라며 외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자란 게 아닐까? 증조부 대신에 증조모의 아버지 보윤을 국조원덕대왕으로 추존한 것에서 이런 추론은 설득력을 갖는다. 아마도 의조가 개성 지역의 해상 호족으로 성장하는 데 외가로부터 지대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성이 없었다!
김관의의 「편년통록」에서는 도선道詵이 일찍이 태조의 아버지 용건을 만났을 때 “아들을 낳게 되면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으로 지어 주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서도 이제현은 이렇게 비판했다.
“태조의 아버지에게 성이 있었을 것인데 자식이 아버지와 다르게 성을 고치게 하라 하다니 천하에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태조와 세조(용건)는 궁예弓裔를 섬겼다. 궁예는 원래 의심과 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태조가 ‘王’이란 글자로 성을 삼았다면 자신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궁예가 그런 ‘왕’이라는 글자로 성을 쓰게 했겠는가?”
궁예의 악행을 미루어 봤을 때, 자신의 부하가 왕王씨 성을 썼다면 궁예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런 분위기에서 왕건 역시 왕王씨 성을 쓰지 못했을 거란 얘기다.
궁예나 왕건은 통일신라 말기의 사람들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성이 없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자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상주尙州 지역의 원종元宗, 죽산竹山 지역의 기훤箕萱, 원주原州 지역의 양길梁吉 등이 당시 유명한 반란의 우두머리들이다. 이들 역시 이름만 있을 뿐, 성은 없었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것을 도운 네 명의 부장副長, 즉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白玉杉), 능산能山, 사귀沙貴도 이름만 있을 뿐 성은 없었다. 태조는 즉위한 후 홍술에게는 홍洪, 백옥삼에게는 배裵, 능산에게는 신申, 사귀에게는 복卜씨 성을 하사했다. 이런 사실과 도선의 말을 종합해 보면 왕건과 왕융 역시 성이 없었는데 고려 창건 후에 스스로 왕씨 성을 갖고 자신의 조상들도 왕씨로 추존했다고 볼 수 있다.
왕성王姓의 기원
왕건의 실제 조상인 당나라 귀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당시 개성이 당나라와 해상 무역이 활발했던 곳으로 당나라 상인들의 출입이 활발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당나라 귀인은 당시 당나라와 신라를 오고 가며 무역을 하던 대부호 중의 한 명이 아니었을까. 도선국사는 왕건의 아버지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성을 왕王으로 하라’는 말을 남긴다. 아시다시피 중국에서는 왕씨 성이 인구수 1위의 대성이다. 큰 도인의 당부에는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자료가 없으니 더 이상의 추론은 삼가자.
개성 왕씨 이전의 왕씨
개성 왕씨 이전에도 왕씨 성을 가진 인물로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과 백제의 왕인王仁이 있다. 왕산악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거문고 연주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왕산악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 등 유교 경전을 전해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일본의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그 기록이 조금 남아 있다.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왕씨
『환단고기』 「번한세가」 편에는 ‘31세 등올단군 때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부예符隷를 만들어 임금께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고 「소도경전본훈」에서는 ‘진晉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이라는 사람이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먼 후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문이 임금께 건의하여 이두법을 시행케 하고, 그 후손이 해서를 만들었다면 왕씨 가문은 대대로 문자를 다루는 높은 관직에 종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의 신하 중에 신지神誌가 왕명을 출납하고 글자를 만드는 일(造書契)을 맡았는데 혹시 왕씨가 신지의 직책을 대대로 담당한 게 아니었을까? 현재로서는 왕문의 왕씨와 개성 왕씨, 그리고 중국의 왕씨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다.
개성 왕씨의 역사
개성 왕씨는 후삼국의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 왕조 고려를 연 태조 왕건王建의 후예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무너지면서 멸족의 비운에 몰려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꾸고 변방에 몸을 숨겼기에 5백 년 영화를 누린 왕족은 오늘날 한미寒微한 희성稀姓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영웅의 후예, 왕족의 긍지는 5백 년 수난의 세월에도 가실 수 없는 것, 잔인한 보복의 발길을 이기고 이제 가문의 재흥을 준비하고 있다.
왕건의 개국
고려 개국시조 왕건은 신라 말 송악(개성)에서 왕융王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송악의 호족이었다. 스무 살에 태봉 국왕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을 세웠으며, 자신이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에게 금품을 주어 구제함)에 힘써,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913년에는 시중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나 난세 평정의 새 주인으로 믿었던 궁예가 나날이 횡포해져 폭군으로 변하자 신숭겸申崇謙(평산 신씨 시조), 홍유洪儒(의성 홍씨 시조) 복지겸卜智兼(면천 복씨 시조) 배현경裵玄慶(경주 배씨 시조), 유금필 등 동료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대고구려국의 부흥을 내걸고 국호를 고려로 정하며 18년 만에(서기 935년)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한 뒤 다음 해에 후백제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통일을 이룩했다. 이후 북진(만주 고토 회복)을 국시로 내세운 5백 년 왕업이 열렸다.
이후 34왕, 475년, 왕씨의 역사는 그대로 고려사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각인하는 불교 문화를 꽃피웠으며 ‘세계 자기 중의 자기’, ‘자기의 여왕’으로 꼽히는 고려자기高麗磁器를 구워 내는 찬란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세웠던 대고구려大高句麗 부흥의 비원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원元 대신 들어선 명明이, 원이 빼앗아 지배하던 철진鐵鎭 이북의 옛 땅을 내놓으라고 억지 요구를 하자 최영崔瑩 장군이 우왕禑王을 설득, 8만 대군을 일으켜 정명征明의 장도에 나섰다가 이성계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고려는 무너지고 만다.
왕씨의 수난
왕업이 무너지며 왕족 왕씨들은 멸족의 참변을 만난다. 1392년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조를 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다음 날 전국의 왕씨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체포된 왕씨들은 거제도와 강화도에 집단 수용됐다. 그로부터 2년도 채 되기 전인 1394년 4월 15일, 이성계는 이들을 전부 수장시켜 죽여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상을 불허하는 정치 보복, 대량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희생된 왕씨들은 어림잡아 10여만 명, 1961년 간행된 「개성왕씨세보」는 공양왕을 비롯, 당시 강화·거제도 등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1백여 명 선조의 명단을 기록, 역사의 비극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이 태조가 죽은 후 태종은 왕씨에 대한 탄압은 잘못된 것이라 하여 체포령을 철회했다. 태종이 이같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어느 날 밤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났다. 그는 왕씨에 대한 살육을 멈추지 않으면 큰 재앙을 내리겠다고 호령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태종은 이 꿈을 무심히 지나쳤다 한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 때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제주도에서 사육 중인 병마 수백 마리가 이름모를 병으로 죽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만주 일대까지 확산되어 이 지방 일대의 가축들이 시름시름 죽어 갔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이 얘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무튼 태종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씨 탄압 정책을 완화하는 한편 숨어 있는 왕씨들을 찾아내도록 했다.
왕씨의 변성과 분파
이때 나타난 인물이 현재 개성 왕씨들이 중시조로 받드는 왕미王亹다. 그는 그동안 외가 성인 민閔씨로 행세해 오다가 이때 본성을 되찾았다. 이후부터 왕씨는 고개를 들고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거의 없었다. 벼슬은 시키지도 않았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굳이 벼슬한 인물을 든다면 왕희걸王希傑(인조조·副提學) 등 불과 35명 정도이다. 전설에 의하면 관원의 눈을 용케 피신한 소수의 왕王씨들은 옥玉·금琴·마馬·전田·전全·김金씨 등 ‘王’ 자를 변형한 성으로 변성, 숨어 사는 외톨이가 되어 혈맥을 유지했다고 한다. 개성 왕씨는 조선 정조 때 와서 문헌을 조사하고 세보世譜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그때서야 왕씨로 환성還姓하고, 고려 태조가 수도로 정한 송악의 옛 지명인 개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개성 왕씨는 제왕을 조상으로 칭할 수 없기 때문에 태조의 열다섯째 아들 왕원王垣을 1세조로 하는 동양군파東陽君派, 신종의 둘째 아들 왕서王恕를 파조로 하는 양양공파襄陽公派, 고종의 둘째 아들 왕창王淐을 파조로 하는 안경공파安慶公派, 충정왕자 왕제王濟를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현종의 넷째 아들 왕기王基를 파조로 하는 평양공파平壤公派 등으로 나누어 세계를 잇고 있다.
개성의 연혁
개성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처음에는 송악군松嶽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러 왔다. 고려 왕조 500년 도읍지로서 만월대滿月臺, 성균관, 선죽교善竹橋, 목청전穆淸殿, 경덕궁 터 등 명승지가 많다.
그 밖의 왕씨
해주 왕王씨
해주 왕씨의 시조는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 오吳 제국 산둥성山東省 태생이며 고려에 귀화한 사람 왕유王儒이다. 태조 때 왕씨 성을 하사받고, 대상大相(고려 때 향직4품)을 지냈으며, 장순공章順公에 봉해졌다고 한다. 인구조사에서 해주 왕씨는 1985년에는 32명이었고, 2000년에는 146가구 498명이었다.
의흥義興 박朴씨
의흥 박씨의 시조 박을규朴乙規는 본성本姓이 왕씨王氏로 고려의 왕족王族이었다.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조선이 개국되자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춘성春城 거의동車衣洞에 둔거하였다가 태종 때 외가의 성인 박씨朴氏를 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을규乙規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의흥義興(경북 군위군)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56년간의 중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후손 득서得瑞로부터 대代를 이었다. 대표적 유명 인물로는 세종 대의 박근朴瑾, 중종 대의 박승종朴承宗, 박수검朴守儉 등이 있다.
명나라에서 귀화한 제남濟南 왕王씨
제남 왕씨의 시조인 왕봉강王鳳崗은 중국 산동성 제남濟南 출신이다. 문중에서 밝히는 연원에 따르면, 시조는 중국 산동성 제남 장추현章丘縣에서 태어났다. 왕봉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때인 1636년에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선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왕봉강은 선양에 볼모로 잡혀 와 있던 봉림대군과 교분을 맺고, 1645년(인조 23년) 봉림대군 일행이 귀환할 때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왕봉강은 왕문상王文祥, 황공黃功, 정선갑鄭先甲, 양복길楊福吉, 왕미승王美承, 유계산柳溪山 등과 함께 망명하였다. 왕봉강王鳳崗은 조선 효종에게 이문以文이라는 이름을 받아, 왕이문王以文이 되었다.
수난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왕씨는 교서감校書監(정서인행과 천자의 인각을 맡던 관청의 벼슬)을 지낸 왕미를 시작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왕흥王興은 선비善妃(우왕의 비)의 아버지로, 고려 말 우왕 때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고려 때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던 중앙 최고 통치기관의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는 단종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중죄인을 추국하던 의금부의 종5품)를 지낸 왕방연이 폐위된 노산군魯山君(단종)을 강원도 영월까지 호송하고 돌아왔으며, 인조 때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에 오른 왕희걸王希傑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왕의성王義成은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좌승지左承旨(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에 추증되었다.
왕평달王平達(생몰년 미상)는 고려의 문신이자 의조懿祖(작제건)와 원창왕후元昌王后의 아들이다. 신라 말기의 문신文臣 출신이며 고려 태조의 숙부叔父이다.
왕식렴王式廉(생년 미상 ~ 949년 2월 7일, 음력 1월 7일)은 신라 출신 후고구려의 귀족이자 고려의 왕족으로 태조 왕건의 백부 왕평달의 아들이며 왕건의 사촌 동생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정종 즉위를 도운 공로로 광국익찬공신에 책록되었다. 왕신과 왕육의 형이며, 왕희순과는 사촌 간이다. 본관은 개성開城 시호는 위정威靜이다.
왕방연王邦衍(생몰년 미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조선 세조 때의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왕방연은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했다. 영월에서 돌아오면서 단종을 그려 읊은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 등에 실려 전한다.
왕순례王循禮(? ~ 1485년 6월 10일)는 조선의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이다. 본관은 개성이며, 고려 현종의 후손이다. 고려 멸망 후 공주公州에서 제우지齊牛知라는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살아가다가 조선 문종 때 정체가 드러났으나, 문종이 그를 특별히 사면하여 숭의전부사로 제사를 봉사하게 하였다.
왕희걸王希傑(1505년 ~ 1553년) 1534년(중종 2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5년(인종 1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1546년(명조 1년) 경성판관, 1550년 비변사낭관, 1551년 자산군수慈山郡守,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1552년 홍문관 교리, 의정부 사인을 역임하였다.
그 밖에 한말의 독립운동가 왕재일王在一은 광주고보에 다니면서 비밀단체인 성진회를 조직하여 광복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개성 왕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 쓰기 위한 과거로 대과)에 7명, 무과武科(무관을 뽑기 위한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1명, 사마시司馬試(진사를 뽑던 과거)에 26명, 의과에 1명 등 35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개성 왕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콘텐츠닷컴, 송악군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1월 26일 임인 3번째기사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통계청 홈페이지
개성 왕씨 관련 유적
재우齋宇
고려의 도읍이 개성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당과 재우들이 개성과 그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태조묘太祖廟, 현릉재각顯陵齋閣, 현릉기실비각顯陵紀實碑閣, 숭의전崇義殿, 이안청移安廳, 배신청倍臣廳, 전사청典祀廳, 앙엄재仰嚴齋, 고직사庫直舍, 어수정御水井, 홍릉재각洪陵齋閣, 모사재慕私齋, 숭모재崇慕齋, 군자묘사君子墓舍, 용인묘사龍仁墓舍 등이 있다.
숭의전崇義殿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소재, 1397년(태조 6년)에 태조의 명으로 묘廟를 세우고, 1399년(정종 1년)에는 고려 태조와 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경왕)·충렬왕·공민왕의 7왕을 제사 지내고, 1423년(세종 5년)과 1452년(문종 2년)에 중건. 문종은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이와 함께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 외 15인을 제사 지내도록 하였으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어수정御水井
경기도 연천군 소재 숭의전의 입구에 있으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물을 마신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당시 송악)과 철원(당시 태봉)을 왕래하면서 중간 지점이었던 이곳에서 쉬어 가며 물을 마셨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숭의전 자리에 왕건의 옛집 또는 왕건이 세운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 : 경기도 연천군 공식 블로그]
고려 고종의 홍릉
고려는 대몽 항쟁기에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으므로 강화도에 왕릉이 소재한다.
유지遺址
유지는 고려궁高麗宮, 마니산이궁摩尼山離宮, 궁성宮城(강화), 고려산성高麗山城, 왕자산성王字山城, 유려왕산성留麗王山城, 광덕사廣德寺, 개천사開天寺, 만복사萬福寺 등이 있다.
만월대滿月臺
고려의 정궁터로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다. 만월대는 919년(고려 태조 2년)에 창건되었다. 본래 만월대는 정전인 회경전(1023년 건축)과 그 기단 일대를 가리키므로 이 궁궐의 정확한 명칭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이후 조선 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음력 정월 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다.
강화도의 고려궁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고종 19년)부터 다시 환도한 1270년(원종 11년)까지 38년간 사용되던 고려 궁궐터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가 군대를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족보 간행
무오보戊午譜(정조 22년, 1798년), 경술보庚戌譜(철종 1년, 1850년), 신사보辛巳譜(고종 18년, 1881년), 무오보戊午譜(1918년) 신축보辛丑譜(1961년), 갑인보甲寅譜(1974년)
향사享祀
숭의전 대제 매년 4월 5일, 10월 3일
집성촌
■ 경기도 이천시 율면 오성리
■ 경기도 화성시 미산면 아미리
■ 경남 의령군 의령읍 상리
■ 충청북도 청주시
■ 개성특별시 개풍 구역
중국의 왕씨
왕씨 성은 중국에서 2018년 기준 호적에 등록된 인구가 1억 150만 명으로 2위 리李씨 성(1억 90만 명)을 따돌리고 인구수 1위의 성이다. 왕씨의 연원은 대체로 10가지 정도로 전해지는데, 실제 알려진 연원보다 다양한 근원이 있다. 왕씨는 대부분의 한족과 5호 16국 시대 선비족, 몽골족, 기타 만주족에 걸쳐 있었다. 대표적 왕씨는 다음과 같다.
1. 북해北海 왕王씨
이 갈래의 왕씨는 요姚 성에서 나왔다. 즉 순임금의 후손이다. 최초에 북해, 진류 일대에 거주했다. 이 지역의 규嬀, 진陳, 전田씨 성과 일가였다. 기원전 368년, 전田씨 성이 강姜씨 성을 대체하여 제齊나라의 군주가 된다. 역사에서는 이를 ‘전씨대제田氏代齊’라고 한다. 8대를 내려간 후,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하고 자손은 서인으로 격하된다. 그중 한 갈래는 자신들이 제나라의 왕족이었다는 이유로 ‘왕王’을 성으로 삼는다.
2. 원성元城 왕王씨
이 왕성은 ‘규嬀’씨 성에서 나왔다. 역시 순임금의 후손이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킨 후, 제 왕실의 전씨 후손은 뿔뿔이 흩어진다. 서한西漢(전한前漢) 초기, 전안田安의 한 갈래가 평릉平陵(지금의 산동성 동평)으로 간다. 나중에 전안의 4세손 왕하王賀는 화를 피해 위나라의 수도인 원성 위속리委粟里(하북성 대명현 동쪽)로 이동했다. 이 갈래가 원성 왕씨이다. 왕하의 손녀인 왕정군王政君의 아들 유오劉鰲가 서한 원제元帝의 태자가 되며, 왕정군은 황후(효원황후)가 된다. 왕정군의 조카는 그 이름도 유명한 왕망王莽이다. 그는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신新’ 왕조를 건립한다.
3. 경조京兆 왕王씨
이 갈래의 왕씨는 원래 희姬씨 성으로 주나라 천자의 후손이다. 시조는 전국시대 위공자魏公子 무기無忌이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후, 그의 자손은 태산으로 도망친다. 그때부터 ‘왕王’을 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패릉覇陵(섬서성 서안의 동북쪽)으로 옮겨 가는데, 이곳은 경조윤京兆尹이라는 지명에 속했으므로 나중에 경조 왕씨라 칭해진다. 당나라가 망하면서 이 왕씨는 점차 소리 없이 사라진다.
4. 태원太原 왕王씨
이 갈래의 왕씨는 주령왕(주周나라 23대 영왕靈王)의 태자 진공晋公의 후손이다. 민국시대 왕사괴당각본 <여요상당왕씨종보>의 기록에 따르면, “태원 왕씨는 시조가 태자 진晋이다. 즉 주령왕의 태자이다. 이름은 진晋이고, 자는 자교子喬이다.”라고 했다. 원래 성은 ‘희喜’이다.
태원 왕씨의 후예 중 왕종경의 후손으로 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한 진秦나라의 명장 왕전王翦은 일찍이 연나라를 정벌하고,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월을 정복하는 등 전공이 혁혁했다. 왕전의 아들 왕분王賁도 진나라의 장군으로 일찍이 초군을 무찌르고 위나라를 평정하며 요동을 정벌하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왕분의 아들은 왕리王離이다. 진 2세 황제는 변경 수비를 맡고 있던 장군 몽염의 병권을 빼앗은 후 그를 대신하여 왕리를 대장군에 임명했다. 왕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왕원王元, 차남은 왕위王威이다. 진나라 말기, 왕원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瑯琊로 옮겨 간다. 그는 낭야 왕씨의 시조가 되었다.
5. 낭야瑯琊 왕王씨
이 갈래의 왕씨의 시조는 한漢나라 때의 왕원王元이다. 전란을 피해, 낭야 호우성(산동성 즉묵卽默)으로 이주했다. 4세손 왕길王吉은 관직이 서한 선재宣帝 재위시 박사간대부搏士諫大夫에 이른다. 낭야 왕씨 흥성의 물꼬를 틀었다. 동진에 이르러 자손 왕도王導, 왕돈王敦은 건국의 공으로 황제에 의하여 요직에 임명된다. 위진 남북조 때, 왕도의 6세손이 북위에 투항한다. 북위가 동위, 서위로 분열된 후, 이 갈래의 왕씨는 정치와 사회적 지위가 점차 쇠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