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림답부明臨答夫(67년~179년)는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 차대왕次大王· 신대왕新大王시대의 인물로 고구려高句麗의 초대初代 국상國相이다. '명림明臨'은 姓이며, 명림明臨씨는 椽那部에 소속되어 있던 姓씨이다.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로 있다가 차대왕이 폭정을 일삼자 99세의 나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동생 백고佰固를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166년(신대왕 2년) 최초의 국상에 임명되었고,패자沛者 벼슬을 더해 내외 병마兵馬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梁貊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172년, 한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이 이를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농성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는데,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결국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고, 이에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받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고구려가 외적에 맞서청야전술을 구사한 기록은 사실상 명림답부의 경우가 최초라고 볼 수 있다. 이후로 청야전술은 대대로 고구려가 외침에 대항하는 기본 전술로 자리매김하였는데 이를 최초로 도입한 명림답부의 존재감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179년 9월113세의 나이로 죽자 신대왕이 직접 애도를 표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