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德洞이라는 이름은 고려高麗 충신忠臣 이양중李養中의 높은 덕을 기리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양중은 대학자인 정몽주, 이색, 길재, 서견, 이방원과 더불어 여섯이 결의형제를 맺었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되자 이에 격분한 이양중은 남한산으로 도피하였다.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우정으로 한성판윤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태종이 양주에서 군사 사열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돌여울(石灘 지금의 고덕천 입구)에 은둔해 있는 친구를 직접 찾아왔다. 이양중은 농부가 입는 평상복 차림으로 거문고를 들고 막걸리를 권하며 옛날에 친하게 지내던 벗을 대접하였다. 태종이 시를 지어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와 엄자릉嚴子陵으로 보나 한나라 왕도정치는 모두 우정에서 왔지 않는가?” 하니 그 역시 시를 지어 답하기를 “옛날의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對酌이 있으리오.”하였다. 태종이 궁으로 돌아간 뒤 대신들이 이양중을 탄핵하여 말하기를 “일개 필부로서 군주를 무시한 죄가 큽니다.”하면서 죄를 주자고 청하니 태종은 크게 노하여 가로대 “무릎을 맞대고 술을 마신 것은 우정의 두터움이다. 자고로 왕에게는 굳은 친한 벗이 있느니라.” 하면서 그의 높은 덕망과 지고지충의 충절을 오래 기리기 위해 그가 사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명명하도록 하였다.
또 다른 고덕동의 유래는 어효첨魚孝瞻, 어세겸魚世謙, 함부림咸傅霖, 박은朴訔 등 덕이 높은 네 명의 정승 산소가 있다하여 고덕동이라 하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