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6대 임금에 오른 인조(선조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첫째로 태어난 능양군)때 이괄이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난을 일으키자 인조는 공주 공산성에까지 도망가 백성한테 떡을 진상 받았는데 맛을 본 인조의 한마디 "맛이 절미(絶味)로다 이것의 이름이 무엇인고"라고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고 단지 임씨성을 가진 백성이 진상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떡 이름이 임절미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절미가 변하여 지금의 이름인 인절미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중국의 유교경전인 《주례(周禮)》에서는 인절미가 떡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粉(분자,인절미)가 白餠(백병,쌀떡), 黑餠(흑병,수수떡), 食(이식,술떡)등과 함께 종묘대제(宗廟大祭)에 올리는 떡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종묘대제에서도 역시 인절미를 제상에 올렸다. 조선 영조 때 유중임이 엮은《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성호 이익이 쓴《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가 기록되어 있다. 1795년(정조19)에 정조가 연 어머니 혜경궁(惠慶宮)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팥고물을 묻힌 대추인절미와 잣가루고물을 묻힌 석이인절미, 깨고물을 묻힌 건시인절미가 나온다. 1809년(순조9)에 빙허각(憑虛閣)이씨가 엮은《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인절미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이런 기록은 인절미가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만들어 먹는 떡임을 말해 준다. 1958년 발간된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에서 인절미의 종류는 인절미, 깨인절미, 대추인절미, 팥인절미, 쑥인절미 등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인절미는 "찹쌀을 쪄서 떡메로 친 다음 네모나게 썰어서 고물을 묻힌 떡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동의보감에서는 "찹쌀은 소화기관을 보하며 오장을 따뜻하게 한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