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峨嵯山의 由來-鳳城溫씨
고구려 온달溫達 장군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고구려高句麗가 장수왕長壽王의 남진 정책으로 이 지역을 차지한 후 고구려 영양왕 때, 평강공주平岡公主의 남편이며 돌아간 평강왕(평원왕)의 사위인 온달 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이 지역을 비롯한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곳 아차산의 산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戰死하였다는 것이다.이때 고구려 군이 온달 장군의 시신屍身을 평양으로 옮겨 가려 하였으나 장군의 한恨이 맺혔음인지 영구靈柩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에 [아내인 평강공주가 평양으로부터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며 “사생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 갑시다. ” 하자 관이 움직여 돌아가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곳 주민들은 “아차!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그만 죽고 말았구나.”라는 의미로 이곳을 아차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차산의 이름은 원래 아단산阿旦山으로 생각되는 바, 삼국시대에 이미 이곳에 아단성阿旦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이름이며, 그 뜻을 보면, 아단의 아阿는 한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의 준말이요, 단(旦)은 돈탄과 같이 고구려의 지명地名 끝에 흔히 붙는 곡(谷: 골짜기)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또는, 아차산, 아차성이란 말이 ‘나의 산’, ‘나의 성’ 이라는 말의 고어古語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아단阿旦이 아차阿且로 바뀌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자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임금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슷한 글자인 차且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아차산阿且山의 한자가 바뀌어 아차산峨嵯山이라 부르고 있으며, 아차산의 이름에 얽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아직 일치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