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施씨가 나랏님이다”-浙江施씨
절강시씨浙江施氏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明나라에서 귀화한 무장武將 시문용施文用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다. 그는 인조仁祖1년에 고향에 내려와 살다가 인조14년에 청나라에 항복할 때 청태종이 조선에 있는 명나라 장수를 잡아 보내라 하였으나, 인조는 반대로 시문용을 피신케 하여 성주군 수륜면에서 살다가 유격파총遊擊把摠 서학徐鶴 장군과 함께 성주 용암면 군성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뒷산에 대명단大明壇을 조성하고 초하루 보름마다 조복입고 단에 올라 조선의 부흥과 조국의 중흥을 기원하였다. 서학 장군은 시문용과 동향사람이며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으며, 끝까지 시문용과 함께한 사람이다. 그때 그 단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대구의 대명동이 두사충 장군에 의해 대명동 동명이 생겼듯이 이곳 마을 이름이 이때부터 대명동이 되었다.
후손들은 재야에 파묻혀 살았으며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주였다. 구휼미를 무상으로 푸는 등의 구제 활동을 많이 실시하여 당시 고령 주민들은 "시施씨가 나랏님이다" 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영조英祖대에 이르러 당시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임진왜란 참전용사〉후손들의 생활상을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자 영조는 문용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고 그 후손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면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대일항쟁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